서방 국가들도 이제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를 비난만 할 수 없을 것 같다. 겉으로는 카다피의 민간인 학살에 열을 올리지만, 그가 가진 '오일머니'에 군침을 흘리고 수년간 뒷거래를 해온 부도덕성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미국 워싱턴포스트(WP) 등 외신들은 25일(현지시간) 리비아투자청(LIA)의 내부 보고서를 인용, "카다피의 돈줄 역할을 하는 리비아 국부펀드가 투자 실패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6월30일 작성된 19쪽 분량의 LIA 보고서를 보면 세계 유수의 금융기관들이 오랜 기간 리비아 국부펀드 자금을 굴려 왔음을 알 수 있다. HSBC, 골드만삭스 등 대형 은행뿐 아니라 칼라일, GLG, 퍼멀 등 투기성이 강한 헤지펀드까지 너도나도 리비아 국부펀드에 눈독을 들였다. 당시 펀드 소유주인 LIA의 투자 자산은 533억달러(약 58조원). HSBC와 골드만삭스는 LIA가 소유한 현금을 각각 2억9,269만달러, 4,300만달러 유치했다. 미국에 대한 부채를 갚을 요량으로 미 재무부 채권에 투자한 금액도 10억 달러를 넘는다.
이들 기관이 리비아 국부펀드를 주목한 것은 2006년. 미국이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한 시기와 일치한다. 금융회사들은 리비아에 대한 금융제재가 풀리자마자 불과 몇 달 만에 400억달러어치의 상품을 팔아 치웠다.
자산 규모는 엄청나지만 수익은 형편없었다. 가령 프랑스 소시에떼제네랄(SG)이 운영하는 상품의 가치는 18억달러에서 10억5,000만달러로 거의 반토막이 났다. 주식과 외환시장에 투자한 한 파생상품의 경우 손실율이 무려 98.5%에 달해 사실상 깡통계좌가 됐다. 보고서는 국부펀드 전체의 자산 가치를 35억~50억달러로 적시했다. 규모(533억달러) 대비 자산 가치가 10분의1로 쪼그라든 것이다.
문제는 서방 금융기관들이 카다피 일가에 의한 국부펀드 전용 가능성을 알면서도 접근했다는 데 있다. 실제 WP에 따르면 펀드의 주 재원은 리비아 국가 자산인 석유 판매 대금이지만, LIA는 카다피의 차남 사이프 알 이슬람이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 부패감시기구 글로벌위트니스의 로버트 팔머는 "다수의 글로벌 금융기관들은 국부펀드가 카다피의 쌈짓돈이 될 것으로 확신하고 그와 거래를 하고 싶어 혈안이 돼 있었다"고 말했다.
LIA 자산은 현재 미국과 유럽연합(EU)에 의해 동결돼 인출은 물론 신규투자도 불가능하다. 카다피의 자금줄을 막기 위한 조치이지만 내전과 제재가 길어질수록 애꿎은 피해는 리비아 국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반카다피 시민군 관계자는 "동결된 자금은 리비아 국민의 혈세이기 때문에 즉각 시민군 측에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자금을 돌려받는다 해도 국제 금융자본의 투자 실패로 리비아 국민은 빈 곳간만 확인할 가능성이 높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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