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4일 개막한 서울국제문학포럼이 26일 끝났다. 대산문화재단 주최로 5년에 한 번씩 열리는 이 행사에 올해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르 끌레지오, 저명한 영국 시인 앤드루 모션, 그리고 중국작가 가오싱젠 등이 참여했다. 물론 다수의 한국 작가들도 참여했다. 나 역시 그 행사의 한 세션에 참여했는데, 그곳에서 호주 시인 테리 잰치를 처음 만났다. 시인이며, 배우이며 독백가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성적 소수자이기도 했다.
소수자의 삶투성이 세상
다문화시대의 자아와 타자에 관한 주제를 가진 발표문에서 그는 싱가포르 시인과 함께 했던 공동창작 작업의 경험을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그의 성적 소수자로서의 관심과 고민에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대단히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는 당당함이나 그 진지함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문학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또한 간단하기도 하다. 문학은 상처이며 좌절이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질문이다. 우리가 익숙하다고 믿었던 것들을 전복하는 것이며, 그 뒤엎어진 바닥에서 근원적인 질문을 건져 올리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래서 성적 소수자의 권리에 관한 테리 잰치의 질문이 나에게는, 성적 소수자에 대한 것을 넘어 문학에 관한 질문으로 들렸다. 그 질문을 내가 받아서 말을 이었는데, 부끄럽게도 내 대답은 문학적이지가 못했다. 아름답지 못했다거나 유려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그저 내가 알고 있던 상식을 그 자리에서 되풀이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성적 소수자를 인정하는 것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차이, 한국에서의 상황, 그런 것들.
물론 작가라고 해서 세상의 모든 부조리에 대해, 모든 모순에 대해 다 알고 있거나 다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자리에서 내가 부끄러웠던 것은, 어떤 종류의 소수자가 갖고 있는 질문의 절박함이나 진정성을 내가 그때까지 가슴으로 느껴보려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단 성적 소수자에 관한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둘러보면, 우리들 주변에는 소수자로 살아가는 삶들투성이다. 실은 어쩌면 나 또한 소수자일지도 모른다. 소수자이면서도 자신을 소수자라고 말할 수 없는, 그렇게 인정하지 않아야만 비로소 안전한 기분을 느끼는, 그런 모순된 삶 속에 나 역시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저 쉬운 예이다. 한국 사람들은 대개 자신들을 중산층으로 여긴다는 기사를 오래 전에 본 적이 있다. 조금 더 많은 쪽으로 끼어서 심리적 박탈감을 위로 받고자 하기 때문일 터이다. 나 역시 내가 중산층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단 한 번도 중산층의 의미 규정에 대해 진지하게 알아보려고 한 적이 없는 것이다. 그저 그렇게 믿어야만 좀 마음이 편했을 뿐이다.
절박한 질문했는가 반성
오늘 일년간 이어왔던 내 칼럼을 끝맺는 날이다. 상식적인 질문을 참 많이도 던졌다. 신문 지면에 실리는 칼럼이고, 또 정해진 매수도 있으니 이 정도면 좋겠다 하는 질문들을 고르고 또 썼다. 그러나 세상에 '이 정도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질문이 어디 있겠나. 내가 이건 넘치는 질문이다라고 생각하는 사이, 누군가는 죽기도 하고, 누군가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기도 했을 것이다.
테리 잰치가 했던 말을 한마디 덧붙이자. 한국에 오게 되어서 여행서적을 통해 한국에 관한 검색을 했다고 한다. 그 책자에, 한국에 가서는 게이라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라는 충고가 있었단다. 게이라는 말뿐이겠는가. 한국에서, 혹은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없었던 말들, 하지 않았던 말들, 그러면서 할 필요가 없는 말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부끄러운 일이다. 그 동안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 드린다.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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