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KIA 타이거즈에서 ‘기량 미달’탓에 퇴출당했던 내야수 윌슨 발데스(33ㆍ필라델피아)가 메이저리그에서 구원승을 따내는 진기록을 세웠다.
26일 미국 필라델피아 시티즌스뱅크파크에서 열린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신시내티 레즈의 경기. 연장 11회부터 4-4 동점 행진이 이어진 대혈투는 19회까지 이르렀다. 관중석에선 꾸벅꾸벅 조는 팬들의 모습도 보였다.
이미 8명의 투수를 소모한 필라델피아 불펜에는 아무도 없었다. 더욱이 신시내티의 타선은 3번부터 시작하는 클린업 트리오. 찰리 매누얼 감독은 절박한 상황에서 2루수 발데스를 마운드에 올리는 ‘도박’을 감행했다. ‘끝장 승부’를 즐기기 위해 스탠드를 지킨 열혈 팬들은 “힘내라, 발데스!”를 연호하며 열렬한 응원을 보냈다.
갑작스레 ‘등판’한 발데스는 신시내티의 3번 조이 보토를 중견수 플라이로 잡아냈지만 곧바로 ‘제구력 난조’를 드러내며 스콧 롤렌을 몸에 맞는 볼로 내보냈다. 그러나 제이 브루스와 카를로스 피셔를 각각 중견수 플라이와 2루수 플라이로 돌려세우는 뛰어난 ‘위기 관리능력’을 선보이며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총 투구수 10개 중 스트라이크가 5개였고, 최고 구속은 145km까지 나왔다. 기록만 놓고 보면 웬만한 불펜 투수 못지 않았다.
필라델피아는 공수 교대 후 1사 만루에서 라울 이바녜스가 끝내기 중견수 희생플라이를 날려 6시간 11분에 걸친 대혈투를 마감했다. 당연히 승리 기록은 발데스 몫으로 돌아갔다. 팀 동료들은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면도 크림 세례를 퍼부으며 역사적인 기록을 축하해줬고, 관중들도 기립박수를 보냈다. 메이저리그에서 야수가 승리 투수가 된 것은 2000년 8월23일 애틀랜타전에서 연장 12회 1이닝 무실점을 기록한 콜로라도 포수 브렌트 매인에 이어 11년 만이다.
이날 경기가 끝난 현지 시각은 새벽 1시19분. 그러나 기록적인 승리를 따낸 발데스는 “3이닝이고 4이닝이고 더 던질 수 있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2004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데뷔해 시애틀과 샌디에이고 등을 거친 발데스는 2008년에는 KIA 유니폼을 입었지만 47경기에서 2할1푼8리(156타수 34안타) 1홈런에 그친 뒤 5월 퇴출당했다.
1982년 출범한 국내 프로야구에서도 선수층이 얇았던 초창기에는 투ㆍ타 기량이 모두 출중한 ‘멀티 플레이어’들이 꽤 있었다. 특히 김성한 전 KIA 감독은 80경기에 불과했던 82년 10승(다승 7위)을 거두면서 타점 1위(69개), 최다안타 3위(97개), 홈런 4위(13개), 타격 10위(.305)의 ‘팔방미인급’ 활약을 펼쳤다.
또 지난 30년간 야수가 한 경기에서 승리 타점과 승리를 동시에 기록한 경우도 김성한(82년 5월15일 광주 삼성전), 최동원(84년 8월16일 구덕 MBC전), 김재박(85년 7월27일 잠실 삼성전) 등 모두 세 차례가 있었다.
이승택기자 ls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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