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6월 뙤약볕이 내리쬐는 어느 날 강원 철원군 중부전선 6사단 인근 철책 너머 비무장지대(DMZ). 백마고지와 북한지역이 한 눈에 들어오는 언덕에서 땀으로 등이 축축하게 젖은 보병 수백여명이 철모 안에 담긴'제초제'를 뿌려댔다. 이 언덕의 숲을 통해 북한 간첩이 침투해 아군의 목을 베어간다는 이야기가 부대에 파다하던 여름이었다.
봄철 내내 빽빽하게 뿌리내린 소나무를 톱으로 잘라 맨손으로 옮겼고, 언덕이 민둥산이 되자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게 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졌다. 매일 아침 어디선가 한 차 가득 드럼통을 실은 트럭이 들어왔고, 병사들이 제초제를 나눠 받기 위해 트럭 뒤에 길게 줄을 섰다. 부대에 변변한 양동이 하나 없던 터라 보병들은 제 머리에 쓰고 있던 철모를 벗어 들었고, 맨 손으로 철철 넘치는 약물을 받아 연신 언덕에 뿌렸다. 자신이 맨손으로 쏟아 부었던 약물이 인류가 만든 최악의 독극물 다이옥신을 함유한 '고엽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32년이 지난 2000년이었다.
DMZ 고엽제 한국군 피해자 박만금(68)씨는 42년 전 그 현장에 있었다. "하루 종일 철조망을 치고 풀, 나무를 걷어내느라 산을 휘젓고 다녔는데, 저녁 때 부대로 돌아오면 통일화(군화) 안으로 온통 고엽제가 스며들어 찝찝하고 축축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그때는 농사지을 때 쓰는 제초제인줄로만 알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등줄기가 서늘해요." 그는 몸서리를 쳤다.
1965년 입대한 박씨는 본래 8사단 공병대 영선반에 소속된 병사였다. 김해공병학교를 나와 공병대대에 배치됐고 철조망, 쇠파이프 등 자재를 관리했다. 67년 9월 '같은 5군단 소속인 6사단에서 대량의 철조망이 필요하다니 트럭 20여대 분을 실어 나르라'는 지휘가 떨어졌다. 그때부터 68년 8월 제대할 때까지 6사단에 파견돼 근무했다. 그의 임무는 6사단 장병들이 비무장지대 남측지역에 제초제를 뿌리면 그 지역에 2중, 3중의 철조망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67년 가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울창했던 산이 벌거숭이가 될 때까지 나무를 베어내고, 언덕에 고엽제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생생히 지켜봤다.
박씨는 "당시 고개를 들면 이북은 숲이 꽉 우거져 있었는데 우리 쪽 505고지, 506고지로는 그 숲이 끊기고, 맨송맨송한 언덕에 수십, 수백명의 병사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어 고엽제를 뿌리곤 했다"며 "풀 못나게 하는 제초제라는 말만 듣고 다들 묵묵히 종일 일했다"고 했다.
그는 "당시 중대장이 말하길 '원래는 헬리콥터로 할 일인데 민감한 지역이라 실수로 북한영역에라도 침범하면 일이 커지니 직접 사람이 퍼 날라야 한다'고 했다"며 "나도 늘 고엽제가 종아리 바짓단을 축축하게 적셨고 손으로도 만졌으니 그때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회상했다.
제대 후 충북 진천에서 벼농사를 짓던 그는 3년 만에 손발 저림이 심한 말초신경병을 얻었다. 당시에는 원인도 몰랐다. 증상이 다소 호전돼 서울로 올라와 토목회사를 차리고 20년 만에 월 수입 억대의 중소기업으로 회사를 키웠는데, 당뇨병이 심해지는가 싶더니 제대 20년 만에 뇌졸중이 덮쳤다. 2급 중추장애 판정을 받고 병원비로 전 재산을 쏟아 부은 그는 현재 영구임대아파트에 거주하는 기초생활수급자다.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아 나오는 것은 월 40여 만원의 수당뿐. 그나마 함께 6사단에서 일했던 장길홍(68)씨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이미 2001년 숨졌다고 했다.
평생 고통 받아온 박씨는 최근 논란이 된 칠곡 고엽제 매립 파문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았다. "아직도 우리나라에 그런 끔찍한 물질이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나마 양심고백을 한 미군이라도 있었으니 망정이지. 이제 아주 미세한 찌꺼기라도 고엽제를 모두 찾아내 반드시 미군이 직접 처리하고 소멸시켜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박씨는 울분을 토했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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