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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철의 문단골 60년 이야기] <8> 박목월과 김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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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철의 문단골 60년 이야기] <8> 박목월과 김관식

입력
2011.05.24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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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광문사라는 출판사에 난생 처음으로 취직을 했을 때, 그 회사의 상근 편집상무가 소설가 허윤석이었고 또 비상근으로 시인 박목월도 껴 있었다. 1955년 늦가을 그 때 출판사마다 검인정 교과서로 아우성들이었다. 이 출판사도 고등학교 영어책의 저자가 연세대 영문과 교수인 권명수였고 중학교 교과서 저자는 당시 태릉의 육군사관학교 교수였던 황찬호, 국어작문 저자는 계용묵과 박목월이었는데, 특히 이들 중 박목월은 그 출판사 직원 자격으로 어엿하게 자기 방 하나까지 배당 받고 있었다. 비상근이라지만 원체 때가 때니만큼 매일 나와서 도와 주었으면 하는 것이 출판사의 뜻이었다.

한데, 목월은 애당초에 나 몰라라 하고 그런 쪽으로는 아예 눈치코치도 없었다. 오후 한 시나 지나서 어슬렁어슬렁 나와서는 자기 방의 2층 창으로 머리를 쑥 내밀고 혼자 휘파람이나 불고 있었고, 바빠서 정신이 없는 판임에도 오불관언 세 시쯤이면 혼자서만 설렁설렁 퇴근을 하였다. 이 자리서 비로소 밝히거니와, 그 때 나는 편집부 교정 일에 여북하면 '곰'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열심이어서 을지로3가에서 지금의 조선호텔 앞 청구인쇄소까지를 매일 서너 번씩 오고 가고 하면서 교정본을 넘기고 다시 새 교정쇄(刷)를 받아오곤 했었다.

이런 판국임에도 그이는 매일 원효로4가 집에서 회사까지를 건들건들 왔다 갔다 하다가, 그나마 두어 달 뒤에는 슬그머니 그만두었다. 그것도, 당시 중앙대학인가 다니던 미인 여학생 하나와 이를테면 '사랑의 도피행'으로 제주도로 떠났다던가.

그렇게 되기 직전에 나는 회사 일로 딱 한번 원효로 4가 끝에 있던 그이 댁으로 물어물어 전차를 갈아타며 찾아갔던 일이 있었는데, 무척 놀랐다. 박목월이라는 시인이 이렇게까지 가난한가 싶었던 것이다. 마침 방문마다 열려 있어 흘깃 들여다본 방들은 그야말로 돼지우리 같았고, 나를 맞이한 사모님의 옷차림도 매일 건들건들 오며 가며 하던 목월 모습과는 하늘과 땅 사이만큼 달라서 여간 놀랍지가 않았다.

이리하여 그 훨씬 뒤 60년대 후반에 들어서 목월이 육영수 영부인에게 시 지도를 하고, 박재삼과 함께 그 영부인의 전기를 써 냈던 일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었다. 여북 힘 들었으면 그렇게까지 했을 것인가 하고.

그러니까 혹여 그 십여 년 전이던 50년대 중엽에 김관식이라는 새파랗게 젊은 시인이 문예살롱 다방 안에서 여느 문인들이 죄다 보는 앞에서 만취상태로 유독 목월에게만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마구 행패를 부렸던 것도, 바로 그이의 그 정치권력과의 관계를 시인 특유의 감각으로 이미 날카롭게 예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런 때도 목월은 한 마디 대꾸도 없이 완전히 우그러든 얼굴로 당하기만 할 뿐이었던 것도, 지금 돌아보면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 때 김관식이 그렇게 목월에게 행패한 이유인즉 다름이 아니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는, 나도 무척 애송해 마지 않던 그이의 그 대표작 격인 시 구절이, 옛날 당나라 어느 시인의 시를 자기 것마냥 훔쳤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목월은 한 마디 대꾸도 못하고, 그냥 그대로 저렇게 당하고만 있는 것이었다. 어찌 저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 때 목월의 반응은 나로서는 여간만 의외가 아니었다.

김관식은 본시 충청도 논산 사람이었다. 박재삼과 동갑내기여서 나 보다 한 살 아래였다. 일설에는 그보다 실은 나이가 많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모르겠고, 나는 지금도 그렇게 나 보다 한 살 아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1955년 여름에 나는 단편 '탈향'으로 작단에 첫 발을 들여 놓은 뒤, 박재삼의 소개로 첫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그이는 처음부터 무척 나에게는 호감을 표시했는데, 그런대로 내 그 첫 작품이 그의 마음에 쏙 들었던 것 같았다. 내 쪽에서도 그의 마지막 추천작이었던 '계곡에서'는 그로부터 60년 가까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그 제목을 기억해 낼 수 있을 정도로 명품이었다. 더구나 그 무렵 막 첫 데뷔한 시인, 소설가로는 내가 만 스물 세 살로 가장 나이가 어렸고, 시인으로는 박재삼과 김관식도 나보다 한 살씩 아래로 가장 나이가 어렸으니 처음 만나자마자 의기투합 했을 밖에.

'문예살롱'에서 그렇게 김관식이 목월에게 여러 문인 환시 리에 행패를 한 뒤, 바로 그 얼마 뒤였다. 단 둘 만의 자리에서 나는 김관식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의 그 견해에 나는 반대다. 그 시는 누가 뭐래도, 틀림 없이 목월 것이야. 네 말대로 옛 당나라 시에도 우연히 그런 구절이 있었겠지만, 그건 엄연히 한문자였어. 그걸 목월이 훔쳤다고? 아니야. 그 시는 100%, 우리 조선 글의 목월의 시야. 나는 절대로 그렇게 믿는다."

그제서야 김관식도 피시시 웃으며 비로소 내 그 의견에 찬성을 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곤 금방 딴소리를 꺼냈다. "그건 그렇고, 모처럼 왔으니, 오늘은 이제부터 한 판 또 벌이자. 재삼이도 불렀으면 좋겠다만, 당장 방법이 없고. 아무튼 오늘은 술 퍼 마시다가 여기서 나 하구 같이 자, 이 형도"

이리하여 나는 그 날 말고도, 당시의 제3공화국 초대 내각의 총리였던 최두선에게 떼를 써서 그 지역 땅 몇 만평을 통째로 얻었다던 (제대로 등기까지는 안 되었을 것이다) 그 자하문 밖 댁에서 그 뒤로도 몇 차례나 잠을 자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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