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책사업 남발? 지역갈등? 재정부담 악순환 끊기가 '1순위'
일명 TK와 PK의 결투로 불렸던 동남권 신공항 후보지결정 논란은 정부가 공항 자체를 없던 일로 해버리면서 무승부로 끝났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본사이전지역을 놓고 전주와 진주가 맞붙었던 싸움은 외견상 경남(진주)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사실상 전국이 얽혔던 과학비즈니스벨트 지역선정은 충남(대덕)의 완승이었다.
하지만 이들 국책사업이 남긴 골은 깊고도 깊다. 모든 사업지 결정에서 패한 호남지역의 민심은 폭발 직전. 대구ㆍ경북지역은 '정권을 배출한 지역'임에도 아무런 소득이 없자, 역차별이 불만을 숨기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의 국책 사업이 지역을 통합시키고 화합시키기는커녕 분열과 갈등을 확대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갈등은 정치세력과 맞물려, 심각한 국론분열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새 경제팀은 무엇보다 갈등을 조장하는 정책이 아닌 갈등을 치유하는 정책이 되도록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 같은 지적이다.
갈라진 나라
지난 16일 정부가 과학벨트 거점지구를 대전 대덕으로 확정하자 경북과 광주 등 탈락 지역은 '원천무효'를 선언하며 크게 반발했다. 앞서 정부가 동남권 신공항 사업을 백지화하고 LH 본사를 진주로 이전한다고 밝혔을 때도 풍경은 비슷했다.
정부로선 지역간 갈등 확산에 장기간 골머리를 앓아 오던 3대 국책사업을 '신속하고 과감하게' 털어버린 셈이지만, 그 결과 나라 곳곳의 상처 나고 갈라진 틈을 다시 메우는 더 큰 숙제를 안게 됐다.
국책사업 유치를 둘러싼 갈등의 1차적 책임은 정치인들의 선심성 공약. 신공항건설도 그렇고, 과학비즈니스벨트도 그렇고 최근 문제가 됐던 국책사업들은 대부분 선거 때 제기된 이슈들이었다. 때문에 정당과 후보자들의 공약남발 자체가 자제되어야 하겠지만, 정부 역시 최소한의 견제역할을 해줘야 한다는 주문이다.
한 정부당국자는 "내년 총선과 대선 때 수많은 선심성 지역공약들이 다시 쏟아져 나올 것"이라며 "만약 그대로 추진된다면 엄청난 재정부담이 소요될 수 밖에 없고 반대로 철회된다면 해당지역의 거센 반발을 초래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내년 대선 때 신공항 문제는 다시 불거질 공산이 크고, 현 정부 국책사업에서 소외됐던 지역에선 반대급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관계자는 "혐오시설은 무작정 기피(님비)하고 수익시설은 무작정 유치(핌피)하려는 지역이기주의를 근본적으로 다룰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역사업, 새 틀 짜야
때문에 전문가들은 국책사업남발→지역갈등심화→재정부담초래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먼저 정부의 환골탈태. 신광영 중앙대 교수는 "원인 제공자가 정부인 이상, 수습 역시 전적으로 정부 책임인데 그 동안은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방안조차 내놓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설동훈 전북대 교수는 "얽히고 설킨 민심을 달래려면 그만큼 치밀한 작전이 필요하다"며 "무엇보다 일방적이고 형식적인 설명에 의존하는 현행 추진방식을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있는 수단부터 제대로 사용하라는 목소리도 높다. 박태순 사회갈등연구소장은 "현 정부에도 사회통합위원회를 비롯, 여러 갈등 조정 기구가 있지만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갈등 예방과 치유를 위한 제도 수술도 권유한다. 박진 한국개발연구원(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선호시설을 유치하는 지역에 이득의 일부를 부담금으로 내도록 하는 방안이 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국책사업 유치가 더 이상 지방에 주는 정부의 '공짜 선물'이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신도철 숙명여대 교수는 "비용의 상당 부분을 지자체에 분담시키거나 기피시설을 함께 가져가도록 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기우 인하대 교수는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검증위원회를 통해 경제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국책사업의 효과를 검증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경성기자 ficciones@hk.co.kr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 "정년연장" vs "청년실업 심화"… 상위20%소득이 하위 5.6배
우리 사회 갈등은 '중앙 대 지방' '지역 대 지역'처럼 지리적 범주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갈수록 확대되는 세대ㆍ계층간 갈등 역시 정부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빠르게 진행되는 고령화는 이미 심각한 세대갈등을 낳고 있다. 지난해 최대 공기업인 한전이 노사 합의로 정년을 기존 58세에서 60세까지 연장하는 형태의 임금피크제를 도입하자 당장 논란이 일었다. 정년연장이 취지는 좋지만 가뜩이나 부족한 청년 일자리를 줄이는 결과를 불러온다는 것.
정부 내에서조차 기획재정부는 "청년실업 심화 부작용을 감안해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고, 고용노동부는 "경제의 파이를 키워 오히려 고용을 늘린다"는 상반된 해석을 내놓을 정도로 시각차가 컸다. 결국 정부는 정원이 한정된 공공부문에서만큼은 현 시점에서 정년연장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잠정 결론을 낸 상태다. 베이비붐 세대 일자리도 중요하지만 당장은 청년실업이 더 시급하다는 고육책인 셈이다.
소득격차 심화로 대표되는 계층간 갈등 역시 만성적인 문제다. 지난해 말 현재 우리사회 상위 20%의 소득은 하위 20%의 5.6배나 됐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소득불균형과 민주주의 성숙도, 정부의 갈등관리능력 등을 종합해 산출한 한국의 사회갈등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7개국 가운데 4번째로 높았다. 특히 정부가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능력인 정부효과성지수(세계은행 발표)는 2009년 현재 OECD 30개국 가운데 21위에 그치고 있다. 연구소는 갈등지수만 OECD 평균으로 끌어올려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7%나 상승할 것으로 추산했다.
박준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정부가 각종 갈등만 효과적으로 예방ㆍ치유해도 경제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 전문가 제언
전문가들은 대형 지역개발사업에 내재된 갈등을 해소할 방안으로 국민이 납득할 만한 객관적인 평가과정을 제도화할 것을 주문했다.
박태순 사회갈등연구소 소장은 "대형 국책사업의 타당성 조사를 대부분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수행해 정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며 "객관성과 공정성을 더욱 높이기 위해 독립적인 전담 검토기구를 신설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대통령 공약사항은 별도 검토 과정이 필요하고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전담기구가 이를 취소할 수 있는 권한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성적인' 여론을 반영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감정에 휘둘리기 쉬운 여론조사 대신 국익을 염두에 둔 국민들의 합리적인 판단을 기준으로 삼자는 것. 박진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대표성 있는 국민 심사단 200명 이상을 선발해 한 장소에 모아 놓고 이슈에 대한 교육을 받은 뒤 의견을 묻는 '공론조사(deliberative poll)' 도입을 제안했다. 그는 "각 지역 대표자가 이들을 대상으로 직접 설명하고, 상호 토론 등을 거쳐 사안의 전후를 충분히 이해시킨 설문한 결과를 일정부분 결정과정에 반영하면 정책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또 "정권 차원의 정치적 판단이 현실적으로 어느정도 개입되는 점을 감안해 평가지표에 아예 '지역균형발전' 등 청와대가 지향하는 가치를 반영해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도 사후 갈등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다"고 했다.
정책에 대해 중간평가를 제도화하는 방안도 제시됐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는 "대통령 단임제의 속성상 당선에 집착한 무책임한 공약이 남발된다"며 "후보자 신분일 때 중간평가를 받아들 일 것인지 공식적으로 묻고, 수용할 경우 취임 2년이 지난 시점에 정책을 종합 평가하면 보다 검증된 공약이 나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처음 국책사업을 내놓을 때, 일이 계획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어떻게 사후 수습을 할 지에 대한 갈등 수습 로드맵까지 제시토록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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