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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해는 다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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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해는 다시 떠오른다

입력
2011.05.23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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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영국 프랑스 등 열 다섯 분의 EU 회원국 대사들과 저녁을 같이 했다. 고승덕 의원이 EU 대사들에게 한ㆍEU FTA 비준안의 EU 의회 통과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자리였다. 나는 고 의원 혼자서 무려 열다섯 분의 대사들을 상대하기 벅차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코를 꿰여 자리를 함께 했다. 정치인이 아닌 나는 단지 영어를 좀하고 교수라는 이유로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퍼실리테이터, 이른바 얼굴마담 격으로 초대되었던 것이다.

자살률 가장 낮은 그리스

한식으로 차려진 저녁은 막걸리 건배와 함께 제법 무르익어 갔다. 이탈리아 대사에게는 베를루니코스 총리의 여성 편력에 대한 질문이 쏟아지는 등 즐겁게 지구촌에 떠도는 얘기를 나눴다.

나의 테이블에는 프랑스 체코 그리스 대사가 함께 했다. 그리스 대사는 척 보기에도 전형적인 희랍풍. 게다가 희랍인 조르바에서 열연한 안소니 퀸을 꼭 빼다 박은 모습에 목소리까지 걸걸했다. 나는 나름 임무에 충실하느라고 그리스가 낳은 전설적인 메조소프라노 아그네사 발차와 나나 무스쿠리를 얘기하며 한껏 그리스를 치켜 올렸다. 특히 무스쿠리의 '하얀 손수건'은 세시봉 가수들에 의해 번안곡으로 불리며 한국에도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설명에 대사의 어깨는 한껏 올라갔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갈 무렵, 나는 그리스 대사에게 다소 무례한(?) 질문을 던졌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 를 읽으면 너무도 그리스에 가고 싶다는 상찬의 말과 함께 하루키가 묘사한 그리스인에 대한 질문이었다. 책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산토리니 해변과 미코노스 섬을 찬양함과 동시에 그리스인들의 무대뽀적인 성격을 거칠게 비판한 대목이 군데군데 등장한다. 호텔의 객실 문이 열리지 않아 전화를 했더니 룸 메이드가 쇠망치를 들고 오더라 등의 에피소드부터 사사건건 선진국 일본과 비교해서 그리스가 황당하다는 식의 인상 비평을, 그러나 그리 밉지 않게 담고 있다.

순간적으로 모든 눈길이 그리스 대사에게 모아졌다. 나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해야 하는 본분을 잠깐 잊었다는 생각에 당황스런 느낌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대사는 역시 외교관답게 노련했다. 우선 좌중을 쓱 한번 훌 터 보더니 일본의 자살률이 얼마나 높은지 아느냐고 되물었다. 다들 이구동성으로 세계 1위라고 답하자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어갔다. 일본이 선진국이면 뭐하냐? 일본인들은 스트레스와 긴장 속에 살고 있다.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지만 세계 최고의 자살률이 말하는 의미를 되새겨 봐야 할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그가 덧붙였다. 그리스 자살률은 세계 최하위권, 모두가 즐겁게 살고 있다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잊었다. 한국이 자살률이 일본보다 갑절이나 더 높다는 사실을 과연 나만이 알고 있을까, 아니면 노련한 대사님이 일부러 돌려 얘기한 것이나 아닐까.

한국인의 행복감은 바닥

대한민국은 잘사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세계가 인정하는 아시아 제 1의 민주국가(full democracy category)다. 그럼에도 개개인의 삶의 질이나 행복감은 바닥이라고 한다. 단군이래 가장 잘사는 나라이지만 OECD 국가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은 나라다. 자식들에게 폐가 된다고 어버이날 목숨을 끊은 노부모 등등 자살 뉴스가 쏟아진다. 뭐가 그리 자식에게 폐가 된다고 목숨까지 버렸을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지나가 버린 것은 더 큰 그리움으로 다가온다"고 일찍이 이발소 그림 속의 푸쉬킨이 말하지 않았던가. 연분홍 치마가 휘날리던 봄날은 가지만, 그래도 해는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

지난 1년 반 동안 한국일보 독자와 만났다. 한국일보는 민감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나의 주장을 가감 없이 내보내 주는 쉽지 않은 용기를 보여 주었다. 깊이 감사 드리며 독자 여러분께도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매체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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