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실 입구로 들어서면 높이 3m가 넘는 묵직한 암석 덩어리가 눈에 들어온다. 다양한 농도로 뭉쳐진 돌덩이는 황토색, 검은색에 때로는 붉은색이어서 자연의 색을 닮았다. 한걸음 다가가면 실체가 드러난다. 매듭이 눈에 들어오고, 한자가 읽힌다. 돌이 아니라 한지다. 한지를 이용해 입체 삼각형을 만들었고, 종이를 돌돌 말아 끈으로 매듭을 지었다. 마치 옛날에 썼던 한약 보따리 같다. 이 작은 오브제들이 모여 돌덩이처럼 보인 것.
전통 한지를 이용해 거대한 입체조형을 만드는 작가 전광영(67)씨의 개인전이 내달 1일부터 서울 갤러리현대강남에서 열린다. 그는 한국 작가 중 해외 전시를 가장 많이 했다. 한국인 최초로 뉴욕 로버트밀러갤러리, 코네티컷주의 얼드리치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하는 등 해외 전시가 60여회가 넘고, 우드로윌슨인터내셔널센터 호주국립현대미술관 유엔본부 등이 그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작가는 회화와 부조의 경계를 오가며 한국 전통과 고유의 얼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전통 한지를 3차원 삼각형으로 접고, 종이 끈으로 매듭지은 뒤 이를 이어 붙여 입체조형을 완성한다. “한약방을 운영했던 큰할아버지 집 천장에 삐죽삐죽 매달린 종이 봉지에서 영감을 얻어 우리 전통 소재인 한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특히 100년 전부터 써 왔던 오래된 종이인 한지에 담긴 한국의 전통 얼과 혼에 천착했다. “과거 마당쇠부터 선비, 아낙네의 지문이 고스란히 묻혀 있는 고서를 주로 쓰죠. 그걸 손으로 일일이 말아서 꼬아 작품으로 만드는 작업은 한국의 혼을 모아서 꽁꽁 싼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작품에는 전통적 보자기 문화도 깃들어 있다고 했다. 작가는 “예전에는 시집살이에 지친 딸이 친정에서 쉬고 갈 때 어머니들이 바리바리 보자기에 먹을 것을 싸 주곤 했는데, 정확히 치수를 잴 수 있는 박스와 달리 보자기는 넉넉하고 따스한 정이 서려 있는 문화”라고 했다.
염색 과정도 특별하다. 치자 오미자 앵두 등 천연 재료를 우린 물로 염색하거나 인도 등에서 구해 온 원료를 섞어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빛깔을 낸다. 염색 과정에서 농도를 조절해 입체감도 살린다. 또 한지가 삭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백반 조갯가루 등을 녹인 재료를 특정 온도 이상에서 끓여 바르는 등 쪽염색 기법을 장인들로부터 배워 활용했다.
작가는 염색한 조각을 일일이 평면에 박아 마치 함몰된 웅덩이나 찢어진 상처 자국을 표현한다. 작가는 “푹 패인 웅덩이는 예민해지고, 각박해진 우리의 텅 빈 내면을 표현한 것이고, 푸른색이나 붉은색 타원형을 넣은 것은 그 와중에서도 희망을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작에는 보라색이나 에메랄드를 써 좀더 맑은 느낌을 주는 작품도 나온다.
작가는 이달 말 열리는 아트홍콩2011에서 대형 구 모양의 설치작품을 선보이며, 6월 미국 테네시주의 녹스빌미술관 등에서 순회전을 연다. 전시는 내달 30일까지. (02)519_0800
강지원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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