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19일 행한 중동ㆍ북아프리카에 관한 대국민 연설은 정책의 목표와 대상,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AFP통신은 단적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경제원조를 통해 유럽의 재건을 이끈 '마셜플랜'에 비견된다"고 평가했다.
먼저 오마바 대통령이 신(新) 중동 구상을 내놓은 시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아랍의 봄'이 시작된 것은 올초부터다. 튀니지, 이집트, 예멘, 리비아, 시리아 등에서 이어져온 반정부 민주화 시위 과정에서 미국이 국면 전환을 꾀할 계기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줄곧 적극적 개입을 꺼리며 갈팡질팡했고, "독재정권의 민간인 학살을 방조했다"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미국에 새로운 중동 정책을 밀어붙일 단초를 제공한 것은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제이 카니 미 백악관 대변인은 "과거 수십년 동안 이라크나 빈 라덴, 알 카에다 등과 관련한 군사적 대응에 중동 정책의 초점을 맞춰왔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 미국의 장기 중동플랜을 가로막은 위협 요소의 상징이 사라진 만큼 미국식 민주주의를 착근시킬 기회로 삼으려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민주화 완성을 위한 로드맵을 상세히 밝혔다. "튀니지, 이집트에 대한 대규모 경제지원을 통해 여타 아랍권 국가들의 민주화 도미노를 견인하겠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그는 2년 전인 2009년 6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무슬림과의 화해를 선언했다. 취임 후 처음으로 중동 정책 구상을 밝히는 자리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미국이 물리력을 동원해 정권교체를 하지 않겠다는 점과 아랍권 국가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 등을 강조하며 부시 전 정권과 선을 그었을 뿐이다. 따라서 '경제 근대화'라는 구체적 방법론을 설정한 것은 미국이 비로소 아랍국가들을 동반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튀니지와 이집트는 이미 피플 파워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나라들이다. 그러나 시민혁명 이후의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알자지라방송에 따르면 튀니지의 올해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로 예상되며, 이집트도 국내총생산(GDP)이 9% 이상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 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정치적 권리 못지않게 개인의 기회 박탈과 경제적 불평등이 반정부 시위의 주요 배경이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말했다. 만성화한 가난과 불평등 구조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어렵게 쟁취한 민주화의 싹이 무참히 꺾여 버릴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오바마 대통령은 1990년대 동유럽의 민주화 과정을 언급했다. 서유럽 국가들이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을 설립해 동구 공산권 국가들의 시장경제 전환을 지원했듯, 국제사회와 더불어 아랍권 민주화를 돕자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에 따라 미 해외민간투자공사(OPIC), 세계은행(WB), 국제통화기금(IMF), 아프리카개발은행(ADB) 등 국제 금융기관들이 총동원돼 자금지원 및 펀드조성 등을 담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미국-유럽-아랍권을 아우르는 경제권 통합이다. 현재 아랍 국가들은 글로벌 경제에 편입되기는커녕 같은 역내 국가들끼리도 각종 무역 장벽에 가로막혀 국가경제의 자생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미 정부의 다른 고위 관리는 "석유를 빼면 4억명의 인구를 보유한 아랍권 국가들의 연간 수출 물량이 인구 800만명에 불과한 스위스와 비슷하다"며 시장개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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