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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기억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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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기억 속으로

입력
2011.05.1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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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재작년에 다리를 심하게 다쳤던 남편이 부러진 뼈를 고정했던 철제 핀의 제거 수술을 위해 다시 며칠 입원하게 되었다. 차트를 들여다보던 젊은 의사는 말했다. "축구하다가 다치셨네요!" "네? 아, 네…" 멋쩍은 기색이 역력한 남편을 살펴보다가 의사가 나가자마자 쏘아붙였다. 아니, 역사가라는 사람이 이렇게 사실을 왜곡해도 되느냐, 이러니 후세 역사가들이 고생을 하지! 등등.

걷기운동에 좋다고 신었던 밑바닥이 둥근 마사이족 운동화, '인민 해방구' 광장의 열기, 한 잔 술의 낭만적 객기, 도원결의도 서러워할 동료애 등등 원인은 한두 가지가 아닐 터였다. 소식통에 의하면 춤을 췄다던가, 제기를 찼다던가. 시시콜콜히 설명하자니 복잡하고 민망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공식 기록은 "축구하다 다쳤다"가 되었다.

인생도 역사도 그렇게 간단명료하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진실은 기록보다 복잡하다. 기록 너머를 증언해 줄 당사자들마저 사라지고 나면, 역사는 '기억의 투쟁'이 된다. 신도 바꿀 수 없는 역사를 역사가는 바꿀 수 있다지 않는가.

격동의 근현대사를 바르게 기억하고 되새기자는 열기가 뜨겁다. 리움미술관의 '코리안 랩소디-역사와 기억의 몽타주' 전에서 시각미술을 통해 지난 100 여년의 역사를 만난다. 사진과 영상 등, 미술사의 공백을 보완해 주는 일상문화의 미시사적 연구 덕분에 교과서 속 역사가 다소 입체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1부 '근대의 표상'은 동학 농민운동과 명성황후 시해 등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더듬는다. 안중식 채용신과, 휴버트 보스와 같은 이방인이 본 조선 풍경의 대비, 우국지사의 유묵과 우키요에(浮世繪) 등 일본 측 자료의 대비도 흥미롭다.

2부 '낯선 희망'에서는 해방 이후 현재 다문화 사회에 이르기까지의 굴곡과 애환을 다룬다. 이쾌대, 이중섭 등의 당대 작품과, 신학철, 서도호 등 오늘의 작가들이 재해석한 풍경들이 시공을 초월하여 만난다. 랩소디. 어딘지 비장미가 느껴지는 그 제목처럼 우리 근현대사는 영웅적이고 민족적이며 환상적인 거대 서사다. 가해자와 피해자, 애국자와 반역자, 뺏는 자와 빼앗긴 자, 전쟁과 평화의 증언들이 실로 드라마틱하다.

그런데 그게 다일까? 진짜 기억은 어쩌면 이 강제된 집단적 기억과는 다르지 않을까. 조선 황실의 붕괴를 가족사의 애환으로 다룬 이상현의 다큐멘터리 영상물 <조선의 낙조> , 개인적인 삶과 가족사에 대한 기억을 세밀하게 일기 형식으로 남긴 조동환, 조해준 부자의 <1937년부터 1974년까지>, 인생의 아름다움, 혹은 덧없음을 한 순간에 포착한 안창홍의 <봄날은 간다> 등이 또 다른 기억 속으로 나를 이끈다.

범속한 나날들을 견디게 해 주었지만, 거친 서사의 시대에 차마 드러내 놓기는 민망했던 다정하고 섬세한 기억들. 가령 부끄러운 마음으로 읽었던 몇 줄의 시, 문득 올려다보았던 비 갠 뒤의 맑은 하늘, 자주 철렁 내려앉던 마음을 붙잡아 주던 아이의 웃음소리 같은 그런 기억들 말이다.

거대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보다는 누군가의 가슴에 스며들어 남는 온기. 그게 진정한 기억이 아닐까. 남편의 다친 다리에 대한 내 진짜 기억은 제기를 차다가 뼈가 부러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깁스를 한 채 상주가 되어야 했던 남편을 지켜보던 때의 무람함, 그걸 달래주던 차 한 잔의 온기, 얼마 후 목발을 휘두르며 앞서가던 남편의 등 뒤로 흩뿌리던 흰 벚꽃 잎들의 잔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성혜영 박물관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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