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교수 남편과 초등학교 교사 부인, 슬하에 3남매까지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가족이다. 하지만 남편은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고 부인은 수십 번 이혼을 결심했다. 화근은 도박. 남편은 '손을 자르면 발로 하고, 발을 자르면 입으로 한다'는 도박에 오롯이 20년을 빠져 살았다. 땅 팔고 집 팔아 도박 빚을 갚던 부인은 속이 시커멓게 타 들어갔다.
그런데 이 부부, 아직도 한 집에 산다. 다시 태어나도 또 부부로 만날 것 같단다. 결혼 43년 차 권병휘(72) 조혜자(70)씨 부부다.
충북 청주시에서 각각 고등학교와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던 권씨와 조씨는 지인 소개로 만났다. 궁합이 좋지 않다는 등 양가의 반대에도 "이 사람 아니면 안 된다"고 1968년 결혼했다.
달콤한 신혼은 8개월 만에 깨졌다. 권씨는 학교 숙직실에서 동료 교사들과 밤새 화투를 치며 외박을 하기 시작했고 처남 등록금에까지 손을 댔다. 2년간 잃은 돈만 50만원, 부부가 살던 단칸방의 월세가 1,000원이었던 당시 집 한 채 값이었다.
새 출발을 하자며 부부 모두 70년 서울로 학교를 옮겼다. 그러나 권씨의 도박중독증세는 나날이 심해졌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오면 도박장에 갈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동료 교사들에게는 칠판에 써가며 고스톱을 가르쳤다. '고스톱의 교장, 은사'라 불렸다. 아들이 아프니 집에 오라는 부인의 말에도 "숙직이라 갈 수 없다"며 숙직실에서 밤새 화투를 쳤고, 제때 치료받지 못한 넷째 아들은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숨졌다.
조씨는 이런 남편과 살 수 없었다. 닷새, 일주일간 집에 안 들어오다가 빚만 잔뜩 짊어지고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남편. 이혼 요구만 수십 번, 짐을 싸 집을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는 안 하겠다"는 남편의 약속에 번번이 마음을 돌렸다. 조씨가 밤새 남편을 기다리며 초조해하고 짜증을 내면 아이들은 엄마 눈치만 살피며 상처를 입었다.
변화가 시작된 건 부부가 한 도박중독자 자조(自照) 모임에 나가면서부터. 도박중독자들이 모여 앉아 각자 경험을 터놓고 얘기하면서 스스로 문제를 깨우쳐 나가는 모임이었다. 20년간 도박을 한 권씨조차 86년 이 모임에 나가기 전까지 "나는 여가생활로 화투를 치는 것일 뿐"이라고 여겼다.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교육자로서 도박을 한다는 양심의 가책에 자살을 시도하고, 당시 총 8,000여만원을 도박에 탕진하면서도 중독을 인정하지 않았다.
조씨도 모임에 함께 나갔다. 가족이 겪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도 중독자 못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우자들은 배우자끼리 모여 앉아 경험을 공유하고 상처를 치유했다. 권씨 부부는 매주 금요일 1시간30분간 진행되는 이 자조모임에 꼬박 25년을 나갔다.
이 모임에서 치료를 받으며 권씨는 86년 7월 이후 한 번도 화투를 손에 잡은 적이 없다. 화투를 내려놓자 부인과 잡은 손이 더 단단해졌다. 부부는 항상 함께 여행을 다니고 운동을 하고 텃밭을 가꾼다.
홍익대 전기공학과 교수를 지내던 권씨가 6년 전 정년퇴임 한 후로는 함께 도박중독에 관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권씨는 현재 도박산업규제 및 개선을 위한 전국네트워크의 공동 대표이고, 조씨는 지난 달 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도박 추방의 날' 행사에서 직접 지은 조시(弔詩)를 낭독하기도 했다.
권씨는 "우리 부부가 지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건 서로를 치료할 수 있었던 중독자 자조 모임 덕분"이라며 "도박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부인의 힘과 사랑을 깨닫게 됐으니 오히려 도박에 감사하다고도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씨는 "도박중독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의 병을 인정하고 드러내야 하는데 남편이 의지를 가지고 노력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었다"고 남편을 추켜세웠다.
도박중독 문제에 관한 한 '박사'가 다 된 부부는 "도박은 당뇨병이나 고혈압 같은 평생 질환이기 때문에 지속적인 치료가 중요하다"며 "도박중독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곳인 도박중독예방센터(www.pgcc.go.krㆍ080-300-8275)나 한국단도박모임(www.dandobak.or.krㆍ02-521-2141), 도박중독 치료 전문병원을 찾아 적극적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보라 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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