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이 쓴 <김동리의 삶과 문학> 이라는 책을 보면, 6ㆍ25 전쟁이 터진 직후 서울에서 3개월 간 숨어 지냈던 김동리의 실황이 자세히 나온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월탄을 비롯해 김동리 조연현 등이 지명수배 되는데 동리는 이 소식을 동리의 친형인 범부 선생의 제자이며 조연현의 6촌 동생이던 조진흠으로부터 전해 듣고 처음에는 그의 도움으로 동대문 밖 어디론가로 피신했다. 김정숙의 그 책은 이 무렵의 동리 움직임을 친 조카(범부의 셋째 아들)의 증언을 인용해 전한다. 김동리의>
동리는 북한군 점령 초기에는 돈암동 집과 동대문 밖의 어느 집에서 숨어 지냈는데 그 당시 그 조카는 대학 다니면서 하숙을 하였고, 재동의 아버지(범부) 집(대자의원 안채)에는 벌써 점령군 쪽의 무슨 간판이 붙어 있어 함부로 드나들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 무렵 어느 하루는 묵정동의 조진흠씨 댁엘 찾아 갔는데, "내일 몇 시에 어디로 나오라"고 하여, 다음 날 그 곳엘 나가 보니까 "작은 아버지(동리)가 너를 좀 보자고 한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한밤중 어둠 속에 허허벌판 논둑길과 미나리 밭을 지나서 가 본즉, 허름한 집 한 채가 있는데 들어가서 미리 들었던 대로 그 집 천장의 베니아 판자를 미니까 그 안에 작은 아버지 동리가 계셨다. 그렇게 무슨 쪽지 하나를 주면서 "종각 옆에 큰 빵집 하나가 있다. 그 곳으로 어서 가서 여주인을 찾아 이걸 전하여라" 하여, 뒤에 알고 보니 그 분이 바로 손소희 여사였다. 다음 날 또 그 곳을 찾아가니, 맛 있는 빵을 많이 주어서 양껏 먹고 일어서려는데, 또 한 봇다리 빵을 싸 주면서 "밤이 되거든 작은 아버지에게 갖다 주거라" 하였다. 서너 번 그런 심부름을 되풀이 했는데, 그러다가 조진흠씨도 행방불명이 되었다.
대강 이런 증언으로 미루어 그 때 동리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기는 했지만, 시종 손소희와는 연락이 닿고 있었던 것이다. 동리가 서울에서 석 달 동안 숨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손소희가 갖은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동리만은 끝까지 헌신적으로 감당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1ㆍ4 후퇴 뒤에 동리는 부산 서대신동에 가족들과 함께 거처를 정하고는 손소희와도 따로 살림방을 마련하는데, 어느 날은 본 부인께서 그 집을 기습해 난리를 피우기도 한다. 이 일이 알려져 기자들이 취재를 하고 당시 부산 중앙일보의 특종 기사가 되기도 하여 그 날짜 신문은 아예 그 부분만 접어서 팔려, 가두판매 역사상 최고 부수가 팔렸다던가.
당시 손소희는 이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기 입장을 짧게 밝힌다. "대구로 증발해 버릴 채비를 한창 하고 있을 때 부산 바닥을 송두리째 깨버릴 수 있을 정도의 폭발물이 터졌다. 그 기사는 20%의 사실에 80%의 픽션이 섞여 우리의 결합을 세상에 광고해 준 격이었다. 그것은 또 운명을 수용하는 체념을 굳혀주는 역할도 거뜬히 담당해 주었다. 그것은 나와 김동리씨 결합이 가져다 준 보상이었고 형벌이기도 하였다" 라고.
더구나 그 때 손소희는 모모 통신사에 간부로 근무하던 심모라는 남편까지 엄연히 있었다. 그 남편은 북한 치하 석 달 간에도 괜찮았을 정도로 그 당시로서는 조금 좌경적인 지식인이었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이어서 그 이상의 저간의 사정은 나도 모른다. 그나마 요행스러웠던 것은 그때까지 손소희에게는 친자식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때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동리와 손소희 간의 그런 사건도 전혀 모르고 넘어갔다. 북에서 불과 열여덟 살에 갓 피난 내려와서 부두 노동을 하고, 혹은 초장동 제면소에 일꾼으로 있었으니, 그 때 부산 바닥에서 문학인들 간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에는 아예 관심조차 못 가졌었다.
하지만 나도 그 몇 년이 지난 뒤 1956년에는 '문학예술' 1월호에 단편 '나상'이 두 번째로 추천 완료되면서 작단의 맨 끄트머리에 들어서 저녁이면 명동 '문예살롱' 다방에 드나들고 그 때 회장을 맡고 있던 동리의 직접 권유로 주호회(酒好會) 일원까지 되면서야, 뒤늦게나마 그런 이야기들도 들을 수는 있었지만 그 때는 원체 후일담이라 별로 놀랍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그 무렵, 그러니까 1956년 가을쯤으로 기억된다. '문예살롱' 다방에서 손소희씨가 조용히 나를 구석자리로 불러 막걸리 값이나 하라고 그때의 나로서는 거금에 해당할만한 돈을 두 차례씩이나 주면서 이 일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는 것을, 박재삼이랑 몇몇에게는 자랑 삼아 떠벌렸는데, 사실은 그 때 그 돈은 손소희씨가 허윤석씨에게 전하라는 "계돈" 심부름을 몇 차례 했던 수고비 같은 것이었다.
한데 이 일을 뒤에 알게 된 동리가 손 여사께 잔소리를 하여 부부 간에 조금 다툼이라도 있었던지, 그 얼마 뒤에는 손 여사가 나한테 가볍게 핀잔하는 소릴 했었다. 그 때는 그 일도 나는 그저 무심하게 넘겼었는데, 나이 팔십에 이른 지금에 와서 가만가만 거듭 생각해보니 그 무렵의 동리 나이도 40여세쯤이었을 것이니 약간의 '질투성' 푸념이기도 했겠다고 동리의 어느 인간적 단면까지 흘깃 와 닿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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