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 친구들 실력, 너무 좋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대모가 손자뻘 후배들에게 보내는 말 치고는 좀 별나다. 다음 말은 해설편이다. “ 눈물겨운 희생의 결과란 걸 알기 때문이죠. 요즘 음악 하는 사람들, 생각보다 보통 가정 출신이 많아요.”
‘피아니스트의 대모’라는 말을 수식어처럼 달고 다니는 신수정(69)씨가 돋보이는 것은 후학들에 대한 이해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표현을 빌면 “무대 뒤로 숨어들 나이”에 여전히 현역을 자임한다.
12일 세종체임버홀의 ‘다섯 에센스’ 무대. 이 행사의 예술감독 강동석씨를 비롯, 정상급 주자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실내악의 진수를 펼쳤다. 베토벤의 ‘목관5중주’에서 피아노로 참여키로 된 신씨는 막 올리자마자 혼자 먼저 나와 10여분간 곡 소개를 했다. “주최 측에서 분위기 편안하게 하라 했어요. 곡 설명을 꼭 평론가들에게만 맡기는 관행도 좀 그랬고…. 노인네가 애교 부린 걸로 봐 주세요.”
사실 애교보다 개인적 의미가 더 컸다. “원래는 피아노4중주로 썼던 곡이었고, 30대에는 저도 그렇게 연주했어요. 그런데 목관5중주로는 40여년 만의 첫 공개 연주죠.” 함께 늙어 가는 작품이다. “베토벤은 정말 내가 사랑하는 작곡가에요. 눈물 나게 아름다운 이 곡을 연주했다는 사실이 행복 그 자체입니다.” 그의 말에는 현대나 화려한 낭만파 음악이 이제 기력에 달린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서울대, 경원대 음대에서 학장을 하다 정년 퇴임한 지 4년이다. 그러나 소통은 늘 그의 주제였다. 거의 초연이나 마찬가지인 곡을 위해 리허설을 세 번 했다. “무서운 실력”의 젊은 후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누려니 나이를 잊고 사는 것은 덤이다. “주책스레 비칠까 걱정”이란 말은 아무래도 둔사다.
그는 요즘 말러의 ‘이 세상이 나를 떠났네’ 등의 가사를 나름 번역해 가고 있다. 1960년대 초 빈에서 유학 생활을 한 덕이다. “ 말러의 부인 알마의 자서전 읽고 말러에 빠져들어 그의 흔적이 배인 곳들을 찾았죠. 당대의 예술가들과 염문 뿌렸던 알마의 편력은 줄줄 다 꿸 정도에요.” 그를 두고 “가장 순수한 예술 형태인 음악을 통해 드럭(drug)을 한 기분”이라고 했다.
“음악가는 홀로 싸워야 하는 외로운 존재”라는 그의 말은 운명에 대한 통찰이다. “음반은 없다. 그런 것 못 한다. 자신도 없다”라는 말은 현장 소통에 대한 역설적 확신이다. 이경숙 박흥우씨 등 동료들과 틈틈이 갖는 콘서트는 존재 증명이다. 뜻 맞는 피아노 연주자들끼리 갖는 워크숍 OPF(오픈 피아노 포럼)에서 해 오고 있는 “전화 심부름” 은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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