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깎던 전도유망한 조각가는 1996년 아프리카 모리셔스섬에서 1년간 머무르며 단 한 작품도 조각하지 못했다. 더운 날씨에 도통 작업을 하기 어려웠던 것. 바닷가를 하염없이 거닐던 조각가는 조개껍데기와 달팽이껍질을 주웠고, 그 곳에 일기와 잠언을 끼적였다. 그러다 문득 ‘치열한 창작의 고통 끝에 예술이 탄생하지만, 막상 현실과 괴리감이 큰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그를 괴롭혔다.
그로부터 8년 뒤 조각가 정재철(52)은 예술과 실제 삶의 거리를 좁히는 실험을 한다. 관객이 직접 제작하고 전시하는 새로운 조형실험을 시도한 것. 서울 서초구청 등에서 수거한 폐현수막 2,000여장을 들고 중국, 인도, 네팔, 파키스탄 등 실크로드를 따라 20여개국을 누볐다. 정씨는 “현수막은 우리 문화의 한 단면을 기록하는 사물이자 조악한 미술품이다. 이것을 현지 주민에게 나눠주고, 실제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사용해보라고 해봤다. 미술이라는 형식을 통해 현수막이 지닌 생산과 소비의 매개적 역할, 문화의 중첩과 혼성을 표현하려는 시도였다”고 설명했다.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내달 16일까지 열리는 ‘실크로드 프로젝트’는 그가 7년 동안 폐현수막을 설명하고 전달해준 뒤 어떻게 현지인들이 이를 활용하는가에 관한 과정과 결과를 담은 전시다. 폐현수막 작업, 사진, 소묘 및 여행기록, 영상, 지도, 도장 및 수집품 400여 점이 그 흔적으로 나왔다.
작가는 3차에 걸쳐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먼저 실크로드상의 주민들에게 ‘개인 파산’, ‘아파트 분양’ ‘나이트 댄스’등이 적힌 난잡한 현수막을 나눠줬다. 그들은 이를 모자와 옷, 돗자리, 이불, 햇빛 가리개 등으로 활용했다. 2차에는 2008년 1월부터 10월까지 현수막 100개를 파키스탄, 터키 등의 재래시장에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햇빛 가리개를 직접 만들어줄 것을 부탁했다. 사람들은 손수 현수막에 전통 술을 매달고, 바느질을 하고 디자인했다. 2009년 1~4월동안 진행된 3차에는 영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 미리 만든 햇빛 가리개를 들고 에펠탑과 궁전 등 각 도시 주요지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행위예술을 펼쳤다.
작가는 “미술에 대해 전혀 모를 것이라고 예상했던 이들의 삶에 이미 높은 수준의 예술활동이 이뤄지는 것을 발견했다. 현장작업 그대로가 예술행위였고, 이를 통해 작가와 관람객의 양방향 소통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었다”며 빙그레 웃었다. (02)3217-6484
강지원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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