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탐욕을 그린 전작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과 '노다지'(1961) 이후 또 다른 새로움을 모색하던 중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작품을 구상한다. 내게 있어서 반일 의식은 어린 시절에 맞닥뜨린 부조리하고 억울한 추억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인지 일본영화에 대한 일말의 관심조차 가질 수 없었다. 무조건 싫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즈음이었다. 한번은 일본 사람이 가게에 빙수기계를 처음 설치해 놓고 얼음을 갈아서 빙수를 파는 모습을 보고 신기해서 길 가다 말고 밖에서 보고 있었더니 일본인 주인이 나와서는 다짜고짜 뺨을 때리는 것이다. 어린 마음에도 억울하기만 했다. '쳐다 본 게 무슨 잘못이라고 뺨을 때리나' 생각했다. '우리가 식민지하에 있으니까 아주 낮춰봤구나' 싶었다. 아무 죄 없는 어린애가 뺨을 때린 어른에게 느끼는 분한 감정은 두고두고 머리에 남았으며, 그때부터 일본인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지평선'이나 '사르빈강에 노을이 지다', '죽음의 다섯 손가락' 등의 영화 속에서 은연중에 반일이나 항일감정으로 묻어 나왔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연희전문에 다니던 동네 선배가 나와 같은 동네에서 자란 김상철이라는 동창을 불러 놓고, "광화문에 가면 경찰참고관이 있는데 거기 가면 우리 독립군이 항전하면서 뺏긴 총하고 노획물 등이 전시돼 있다. 거기에서 권총을 두 자루만 훔쳐가지고 와라" 하는 위험천만한 부탁을 했다. 이 선배는 나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즈음 손으로 돌리는 무성영사기로 우리 나이 또래 몇 명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모던 타임즈'같은 찰리 채플린 영화를 보여주곤 해서 '영화를 하면 재미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게 했던 선배였다. 말하자면 이 선배가 내게 처음으로 영화에 대해 눈을 뜨게 해준 것이다.
그런 선배가 하는 부탁이었고, 더군다나 일본 사람한테 얻어맞고 분했던 감정이 있어서 그랬는지 서슴지 않고 한다고 해버렸다. 훔친다는 것이 석연치 않았지만 어차피 하기로 했으니 제대로 해내야 했다. 나름대로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김상철이라는 친구와 의논 끝에 내가 "야, 비 오는 날 가자"고 했다. "왜 비 오는 날 가느냐"고 친구가 묻기에 "판초우의를 입고 가서 (총을)넣으면 안 보이지 않느냐" 했더니 그가 "아! 그거 참 맞다"며 맞장구를 쳤다.
비 오는 날을 기다렸다가 지금의 주한미국대사관 근처에 있었던 광화문 경찰참고관에 들어갔다. 2층인데 다행히 감시가 별로 없었다. 감시하는 경찰관은 한 명뿐이었고 진열장도 그냥 열리게 돼있었다. 노출된 전시장에는 중국 옷과 털모자, 권총, 총알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일본인들은 우리 독립군을 마적 또는 비적이라고 해놓고 '마적한테 노획한 물건을 여기 전시한다'는 식으로 그 경찰참고관을 이용하고 있었다.
판초우의를 입은 우리 둘은 권총 두 자루를 하나씩 끼고 권총에 맞는 총알도 필요할 듯 하여 총알도 걷어 담으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총알이 피라미드식으로 쌓여 있어 한 개라도 잘못 건드리면 요란하게 무너지게 되어 있어 자칫하면 꼼짝없이 잡힐 위험이 있었다.
난 김상철이 보고 "야, 총알은 건드리지 마. 이거 건드리면 우린 여기서 잡히고 만다"고 말했다. 할 수 없이 총만 훔쳐 가지고 나왔는데, 선배한테 갖다 주는 일은 김상철이 한다고 했다. 비 오는 날인데 김상철은 그걸 신문지에 싸서(그 시대는 비닐 포장지가 없기 때문에) 자전거 뒤에 붙들어 매고 갔고 비를 맞아 신문지가 찢어지면서 권총이 땅에 떨어져 친구는 결국 경찰에 잡히고 말았다.
김상철의 부모님으로부터 그 소식을 들었다. 난 어느 시골로 피해야만 했다. 김상철은 일본경찰에게 너무나 총이 갖고 싶어 저지른 단독 범행이라고 진술했고 덕분에 나와 선배는 무사할 수 있었다. 선배와 연결된 지하조직도 안전할 수 있었다. 김상철은 그 사건으로 소년 형무소 형을 받고 3년을 복역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그는 후에 법조계에서 활동하다가 지금은 은퇴해서 조용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몇 년 전 아내와 문경에 관광을 갔다가 우연히 그 친구를 만나 그간의 소식을 들었다. 어찌나 반가웠는지…. 그는 어린 나이에도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여 단독범이라고 혼자 다 뒤집어 쓰고 형무소 생활까지 했으니 내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항일투사요 영웅이었다.
이런 일본에 대한 소소하고 개인적인 기억들이 후에 내 작품에 여러모로 반영되었던 것 같다.
'지평선'(1961)은 젊은 독립군이 청춘을 바쳐가면서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 '이 나라 우리 조국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나라를 찾기 위해서 자기 청춘을 바친 젊은이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보상해 주었는가' 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작품이다. 당시 그러한 얘기는 한국영화에서 다루지 않았던 참신한 소재였다. 주제와 소재 등 모든 것이 첫 시도였기 때문에 모두 새로 만들어야 했다. 엄청난 제작비가 투자되어야 했던 것이다. 우이동에 대형 중국거리 세트를 세웠고 독립군, 일본군, 만주군의 의상도 새로 만들었으며 대·소도구도 모두 새로 마련해야 했다. 이쯤 되니 제작자는 불안해져서 몸을 사리기 시작했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우리 독립군이 일본 헌병대를 기습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의 일이다. 헌병대 정문에다가 중기관총을 설치해 놓고 독립군한테 응사하는 전투 장면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 특수효과나 무술지도, 스턴트맨 등이 전무할 때인지라 이게 전부 감독의 몫이었다. 이 장면을 찍을 때 실탄이 아니면 연발이 불가능해서 실제 기관총을 설치해야 했다. 끔찍한 상황이었다. 동네에 유탄이 날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앞에다가 가마니를 쌓아놓고 거기에다가 쏘도록 했다. 그런데 그 가마니가 모래 가마니여야 했는데, 모래와 섞인 돌멩이들이 가마니 안에 들어있던 것이다. 총을 마구 쏘아대기 시작하니 그 총알이 하나 돌에 맞아 튕겨 유탄이 내 가슴에 날아 들어왔다. 그때가 마침 겨울이라서 옷을 두껍게 입은 데다가 촬영용 콘티를 접어서 끼어놓았다. 총알은 콘티 북을 뚫고 내 가슴 살 3㎜ 정도를 파고 들어와 멈추는 기적 같은 상황이 연출됐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아찔했다.
그때는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영화를 만들 수가 없었다. 오직 영화를 한다는 정열 하나로 온갖 어려움을 이겨낸 또 하나의 영화 같은 이야기이다. 다행히 '지평선'이 개봉되니 '햇빛 쏟아지는 벌판' 이상으로 관객 반응이 뜨거웠으며, 그때부터 한국영화계에 만주대륙물이 유행하게 된다. 미국에 서부영화가 있듯이 한국에는 만주대륙물이 있었던 것이다.
만주대륙물의 시대를 열었지만 그것에 안주하지 않고 난 계속해서 또 다른 시도를 해 본다. 이번엔 남쪽으로 눈을 돌려 '미얀마'를 향했다. 어느 조선 청년이 일본군 소위 계급장를 달고 2차 세계대전에 끌려 나가는 내용의 영화를 위해서였다. 학도병이 미얀마 전선에서 전투를 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얘기였다. '과연 내가 일본 사람이냐, 한국 사람이냐? 나는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내 처지를 어떻게 가져가야 되느냐?' 이런 정체성 찾기의 주제를 가지고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1965)를 연출한다.
여기에는 달콤한 로맨스도, 끈질긴 악연도 있다. 원주민 여자 게릴라 역의 김혜정과의 사랑, 일본군에 의해 자기 어린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복수를 하겠다고 끈질기게 주인공을 추격하는 노인 주선태, 종전이 되면서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데 주인공은 이 게릴라 노인의 저격을 받고 죽게 된다. 죽을 때 주인공의 손에는 '약혼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가 쥐어져 있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 여기서 내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이것은 일본인 탓도 아니고 한국인 탓도 아닌 전쟁의 탓이다'라는 결말이었다.
이 영화에는 강제로 끌려간 한국인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스토리도 있었다. 당시에는 아무도 종군위안부에 대해 다루려고 하지 않았는데 나는 우리 민족이 당한 역사적 비극을 외면할 수 없었고 이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그 역할을 단역으로 하지 않고 일부러 주연급인 최지희를 기용하여 종군위안부라는 존재감에 무게를 두어 드러냈다. 만주든 미얀마든 공간이 어떻게 달라지든 그 밑바닥에는 일본제국과 식민지 상황이라는 암울한 현실이 녹아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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