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신문에 실린 사진 한 장이 안타깝다. 부산저축은행에 예금을 맡긴 피해자들이 부산 초량동 본점에 조사를 나온 대검 중수부 관계자의 옷소매를 붙잡고 울부짖는 모습이다. 맡겼던 돈을 되찾을 수 있다면 옷소매 아니라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피해자 200여명은 초량동 본점에서 며칠째 농성하고 있다. 그 중 한 사람인 60대 여인이 검찰에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며 탄원서를 썼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소처럼 일했습니다. 파출부, 세차장, 폐지수집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그래도 불평하거나 누구한테 미운 소리 한번 한 적 없습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가면 노후에는 편안해지겠지 하며 30여 년 소처럼 일하며 살아왔습니다. 2월17일 새벽, 일하러 나가기 전 부산저축은행 영업정지 방송을 보며 충격에 덜덜 떨렸습니다. 상상도 못했습니다. 은행이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내가 모은 돈이 하루 아침에 휴지조각이 된다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나라에 내가 저금한 돈을 빼앗아가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 가슴이 뛰다가도 한에 눈물이 납니다. 나는 그 돈 포기 못합니다. 내 평생의 세월이 담긴 그 돈은 나와 남편(장애인으로 일곱 살 지능이라고 한다)의 생명 같은 돈입니다. 내 돈 돌려주세요. 나는 그 돈이 없으면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내 저금을 빼앗아가는 나라"
저축은행은 그런 곳이다. 평생을 소처럼 일하며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이 한푼 두푼 모은 돈을, 시중은행보다 1% 아니 0,1%라도 좀더 높은 금리를 준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 저축은행이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상상조차 못하고 가져다 맡기는 곳이다. 그 이웃들은, 은행이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눈치 빠르게 알기 때문에 5,000만원 예금보장한도에 따라 수억 원 수십억 원을 5,000만원 단위로 쪼개 수십 곳 은행에 쟁여놓는 자들과는 다르다.
이런 이웃들의 돈을 놓고 저지른 부산저축은행의 불법대출 등 비리 규모가 7조원대에 달한다는 검찰의 중간 수사결과 발표가 있었다. 저축은행의 비리는 쓰레기 잡범 수준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불법대출은 예사이고, 임원들이 친인척 명의로 100개가 넘는 회사를 만들어 투기성 부동산사업을 일삼고, 비리 폭로하겠다는 전직 은행 직원들에게는 수억 원씩 주고 입막음을 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저축은행을 감독해야 할 금융감독원 등 감독기관의 비리에 있다.
'모피아'(옛 재무부 출신 금융관료)에 이어 '금피아'(금감원+마피아)라는 조어까지 생겼다. 어느 의원은 '금융강도원'이라고 했다. 그리 과한 표현도 아니지 싶다. 저축은행 검사반장을 맡았던 금감원 팀장은 비리를 눈감아주는 대가로 억대의 돈을 받았고, 다른 부국장은 그랜저 승용차를 받았으며, 한 2급 간부는 서울 강남으로 이사한다며 2억 원을 받았다. 더 치가 떨리는 것은 감독기관의 영업정지 방침이 사전 누출돼 은행 임원들이나 특정 고객들은 이미 3주 전에 예금을 특혜 인출한 정황이 드러난 점이다.
서민과 비리의 싸움일 뿐
그랜저가 또 등장하니 '그랜저 검사' 사건이 떠오를 법도 하다. 권력비리 사건에서 공통적으로 자동차 브랜드 하나가 등장하는 데 실소가 나온다. 더구나 저축은행 사태를 수사 중인 검찰이 금감원의 추악한 비리를 작심한 듯 캐내는 것을 두고 검찰이라는 현실권력과 금융검찰로 불리는 금융권력의 싸움, 검찰 대 모피아의 싸움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호사가들의 말일 뿐이다.
저축은행 사태의 본질은 소처럼 일하는 우리사회 서민들이 피 같이 모은 돈을 날려버릴지도 모르게 만든 비리 구조일 뿐이다. 서민과 구조적 권력비리의 싸움이다. 저축은행과 감독기관의 비리를 낱낱이 밝혀낸 다음 구조를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저금한 돈을 빼앗아가는 나라"에 "내 평생의 세월이 담긴 그 돈, 내 돈 돌려주세요"라고 울부짖는 그들에게 분명히 답을 해야 한다. 그래도 나라를 믿었던 그들에게 돈을 돌려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종오 사회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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