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5ㆍ16이 일어난 지 50년 되는 날이다. 자연히 '5ㆍ16과 박정희'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를 놓고 의논이 분분하다.
5ㆍ16이 민주정치의 후퇴를 가져 온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5,000년만의 밥그릇'을 만든 공이 그것을 덮고 남는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5ㆍ16이 없었으면 민주정치 하에서 경제발전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지금 브라질이나 인도가 바로 그렇다. 그러나 1960년대 한국의 조건이 지금의 브라질이나 인도와 같은 것은 아니다.
민주정치와 경제발전의 관계
반면 좀 더 객관적 평가가 가능한 것도 있다. '박정희 리더십'과 경제발전의 관계가 그것이다. 이 둘의 관계는 보기보다는 훨씬 복잡하다.
한국의 경제 '기적'의 원인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다른 개도국에 앞서 세계 자본주의와 통합했기 때문이다. 그 바탕에는 2차 대전 후 세계자본주의의 변모라는 요인이 있다. 그 전에는 개도국이 선진국과 통합된다는 것은 식민지가 되거나 종속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2차 대전 후에는 개도국이 독립을 유지하면서 선진국과의 관계를 통해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구체적 계기는 1960년대 수출 드라이브다. 박정희 대통령은 여기서 강력한 리더십을 보였다. 수출에 금융 재정상의 대규모 혜택을 주고 수출진흥확대회의 등을 통해 직접 챙겼다. 수출 성과에 따라 특정 기업에 대한 개인적 호감도를 결정했기 때문에 기업은 수출을 위해 결사적으로 뛰었다.
문제는 수출 드라이브가 꼭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졌어야 하는가이다. 간단하게 지금 중국처럼 환율을 높게 유지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것은 1960년대 일본이나 타이완도 그랬다.
이것은 산업정책에서도 마찬가지다. 박정희는 수출 드라이브를 거는 한편으로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했다. 그를 위해 강력한 금융재정 정책과 보호정책을 썼다. 그러나 거기에 환율은 별 역할을 하지 못했다.
1960~70년대 한국이 고환율을 유지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높은 물가상승률 때문이다. 한국의 물가상승률은 고도성장이 시작된 1963년 이전까지는 한 자릿수였지만 그 해부터 두 자릿수로 올라갔다. 이것은 당시의 일본 타이완이나 지금의 중국과 매우 다른 모습이다.
결국 박정희 시대 한국에서 고환율의 역할을 금융재정 보호정책이 대체한 셈이다. 그것은 특히 금융에 큰 부담을 안겼다. 두 자릿수 물가상승 하에서 대다수 실질금리는 마이너스였다. 그런 저금리로 자금을 못 얻은 기업은 사채시장에서 높은 금리로 빌릴 수밖에 없었다. 사채 때문에 기업이 부실화하자 1972년 8ㆍ3조치로 사채를 동결했다.
실질금리가 마이너스니 가계는 저축 유인이 떨어졌다. 사채시장의 금리는 높았지만 당연히 불안했다. 따라서 여유자금이 부동산으로 몰려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다. 그런 조건 하에서 박정희는 저축추진중앙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어 저축을 독려하고, 온갖 처방을 동원해서 부동산가격 상승을 막으려 했다.
성장이 정권 정당화 바탕
두 자릿수 물가 상승 하에서 수출 증대와 산업정책을 추진하고, 사채를 동결하고, 저축을 장려하고, 부동산투기를 억제하는 데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했다. 박정희는 그런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만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측면이 강했다. 그것은 본인도 피곤하고 국민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금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금융의 후진성 문제가 배태되었다.
박 대통령이 두 자릿수 물가 상승을 그대로 가지고 간 이유는 무엇인가. 쿠데타로 집권해서 성장만이 정권을 정당화하는 바탕이 되었기 때문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것은 민주정치와 경제발전이라는 문제로 되돌아가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 문제와는 별도로, '박정희 리더십'에 대한 평가는 보기와는 매우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이제민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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