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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 일제가 처음 강요한 '명랑' 이름 바뀌어 지금도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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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 일제가 처음 강요한 '명랑' 이름 바뀌어 지금도 살아있다

입력
2011.05.13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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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섭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발행ㆍ296쪽ㆍ1만3,800원

"1930년대의 명랑에 담긴 의도를 추적하면서 나는 여러 빛깔의 명랑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명랑들에는 식민지 조선이 30년대를 맞아 새롭게 맞닥뜨린 현실이 압축돼 있었다. 그 현실이란 바로 감정 정치와 감정 자본주의였다."

소래섭 울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명랑이란 단어를 파고들었다. 그는 명랑의 의미가 20, 30년대 한국 사회에서 급격히 확장됐으며 이 배후에는 총독부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도시 명랑화 정책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가 펴낸 책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 에는 소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증이 무거운 논문 투가 아닌 에세이 형식 등의 가벼운 문체로 당시 신문 자료 등과 담겨 있다.

저자에 따르면 30년대까지 명랑은 주로 '날씨가 흐린 데 없이 밝고 환함'이라는 뜻으로만 쓰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날씨 외에 성격 감정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의미가 확장됐다. 현재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명랑은 '흐린 데 없이 밝고 환함' '유쾌하고 발랄함' 두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명랑의 반의어는 우울이다.

원래 중국에서 한자어 명랑(明朗)은 날씨 성격 상태 모두를 가리켰다. 반면 일본에서는 성격 감정 투명도를 가리키는 말로 두루 통용됐다. 그런데 중국에서 이 말뜻이 한국으로 건너오는 과정에서 그 의미가 좁아졌다가 식민시기 일제의 정치적 의도로 다시 확장됐다는 것이다. 언어학적인 고찰만 있었다면 이 책은 대중서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일제강점기 이 단어의 의미가 확장된 정치사회적 배경에도 관심을 두고 탐구를 확장해 책을 펴냈다. "30년대 들어 갑작스럽게 통독부가 명랑화를 내세운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 첫 번째 이유는 경성이 근대적 대도시로 발전하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20년대 말 30만명을 조금 넘던 경성의 인구는 행정구역이 확장된 30년대 중반에 이르며 70만명에 육박한다. 짧은 기간에 도시의 규모가 팽창하다 보니 주택, 보건 위생, 치안, 교통 등에서 문젯거리가 속출했고, 총독부는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도시 명랑화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실제로 30년대 총독부는 대경성 명랑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먼저 경성에 오물과 악취로 위생 문제가 대두하자 조선오물소제령이 내려졌다. 거리 치안을 위해 걸인 2만5,000명을 퇴치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한다. 당시 명랑이 불량 불건전 불결 퇴폐의 반의어로 사용된 이유다. 저자는 명랑을 내세운 총독부의 감정 정치가 체제에 저항하는 세력을 억압하고 체제순응적 인간을 양성하려는 목적에서 추진됐다고 분석한다.

당시 학교는 '언행 일치의 명랑한 인격을 양성하라'는 지침에 따라 모범 인간 양성에 나섰고 언론은 퇴폐적이고 저속한 유행가 대신, 명랑한 유행가를 공모하기도 했다. 전쟁 수행에 방해가 되는 신문 잡지 음반 영화 등 대중매체나 오락물에는 퇴폐 난잡 불온 등의 딱지가 붙게 된다. 총독부는 26년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을 제정해 영화의 키스 장면에 '철제처분(부분삭제)'을 내리고 필름에 가위질을 했다.

저자는 당시 명랑화 열풍을 이끈 또 다른 축으로 새로 유입된 근대자본주의를 지목한다. 산보를 즐기는 남자를 부축해 주는 스틱걸, 당구장에서 손님과 게임을 하거나 점수는 세는 빌리어드걸, 주유소의 가솔린걸 등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기계화한 친절을 제공하는 최초의 감정 노동자인 각종 걸이 보편화한 것이 이 시기라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런 강요된 명랑의 잔재는 명랑 운동회나 사회 명랑화 캠페인 등을 통해 이어졌다. 실제로 66년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명랑한 사회 건설'을 조국 근대화 목표로 제시했다. 90년 박준규(민주자유당) 국회의장은 의장의 역할은 "정치 풍토의 명랑화"라고 밝혔다. 저자는 90년대 이후 명랑화란 말은 공식석상에서 사라졌지만 자신의 감정이나 의지와 상관 없이 순응할 것을 강요하는 명랑화의 지상명령은 행복화나 쿨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살아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시인 김기림(1908~?)이 말한 명랑을 제3의 명랑론으로 해석하며 현재까지 잔존하는 명랑을 극복하는 방법을 내놨다. 책은 김기림이 말했던 모더니즘의 핵심은 '지성에 의한 감정의 통제'였으며 그가 사용한 '마음의 화장법'이라는 말에는 자연스러움을 왜곡한다는 부정적 의미는 없다고 해석한다.

"명랑을 최종 목적지로 규정할 때 우리는 결코 명랑해질 수 없다. 도달할 수 있을지 기약조차 할 수 없는 최후의 명랑을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현재의 명랑을 유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명랑을 태도로 인식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박제됐던 현실이 살아 숨쉬기 시작하고 미래에 대한 공포 또한 줄어든다."

한마디로 이제라도 내 감정의 주인이 돼라는 것이다.

김청환기자 ch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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