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주인공이 있다면, 드라마에는 악역도 있어야 한다. 지금도 독한 시어머니, 나쁜 시동생, 전갈 같은 남편 등등 악역 본색들은 끓어 넘치는 고통의 비등점에 주인공을 밀어 넣으려 호시탐탐 스크린 이곳 저곳을 배회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악역만큼 흥미진진한 또 다른 캐릭터가 바로 바보 캐릭터일 것이다. 동화 을 위시하여 에도 나오는 캐릭터. 이 오래된 바보 캐릭터가 요즘엔 재벌의 숨겨진 딸로, 자식을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로 새롭게 캐릭터를 단장한 채 브라운관을 종횡무진하고 있다.
특히 드라마 의 정보석이 분한 봉영규 캐릭터는 IQ는 70이지만 순진무구한 가족 사랑으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흥미롭게도 이 드라마의 핵심은 '속이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주인공 장준하와 차동주 모두 한 사람은 출신 성분을, 또 한 사람은 청각 장애를 주변에 숨기고 살아 간다. 그런데 정보석은 주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속이려 들 때에도 진실을 꿰뚫는 단 한 사람으로서, 가짜 행세를 하는 아들을, 청각 장애를 등 뒤에 숨긴 젊은 재벌을 단번에 알아본다.
사실 타로 카드의 0번이 바보(the fool)이듯, 심리학에서 바보는 매우 원형적인 내면의 자아를 지칭하는 심볼 중 하나이다. 전래 동화의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바보는 스스로가 열등하다고 생각해서 무의식 속에 감추어 둔 자아의 기능, 가면 자아와 달리 잘 쓰지 않고 스스로가 무시하는 자아의 측면을 반영한다. 또 '딸 바보' 같은 용어에서도 드러나듯이 무의식적인 헌신과 맹목적인 사랑을 퍼붓는 비현실적인 자아의 측면을 일컬을 때도 우리는 '바보'라 지칭한다.
그러나 가뭄이 든 한 나라의 왕이 사랑하는 첫 아들과 둘째 아들에게 기대며 바보 아들을 홀대하듯이 내면 속 바보, 무의식 속에 숨겨진 직관과 통찰력을 우습게 본다면, 우리의 마음의 왕국은 지나치게 가면 자아에 의존하여 허영의 불꽃에 넘어가 버릴 것이다. 사람이 지나치게 똑똑하려 들수록 계산적일수록 오히려 제 꾀에 제가 넘어가게 되는 법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왜 작금에 이토록 바보 캐릭터가 줄을 잇고, 진실을 아는 유일한 목격자로 '똑똑한 바보'가 등장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그만큼 외면적인 가치, 눈에 보이는 것들 즉 가짜 학벌로 위장한 유명인, 명품을 흉내낸 짝퉁이 우리 사회에 판치기 때문이 아닐까. 현실이 각박하고 자격증과 학벌로 검증되는 스펙이 모든 것이 되는 요즈음,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진짜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바보를 사람들은 마음 속 깊이 그리워하는 것 같다.
물론 여기서 바보란 그저 지능이 낮은 지적 장애인이나 정신지체를 뜻하는 게 아닐 것이다. 현실이 고달파도 우직하게 한 우물만 파는 사람. 보수가 낮아도 좀 힘들고 불만족스러워도 가족을 지키고 직장을 지켜 내는 사람.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사람.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너무 많은 헛똑똑이들을 양산할수록 앞으로도 우직한 바보 캐릭터들은 더 빛이 날 것이다.
그래서 매력적인 바보 캐릭터의 등장이 반갑고 흥미롭지만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작금의 세상이 얼마나 간판에 의존하는 사회인지 반증하는 것 같아 한편 우울하기도 하다. 소리 없는 자살자의 침묵이 쌓이고, 외마디 절규와 농성이 스펀지처럼 블랙 홀로 빨려 들어가는 즈음. 세상을 더 단순하게 살라는 바보 캐릭터가 전달하는 삶의 지혜. "Stay Hungry, Stay Foolish"라는 스티브 잡스의 충고처럼 우리는 우리 안의 바보들의 말에 좀 더 귀 기울여야겠다.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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