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스승은 60대 제자의 큰 절을 받고서는 당황해 하면서도 흐뭇하게 웃었다. 스승의날을 이틀 앞둔 13일 서울 마포구 염리동 일성여고 강당. 올해 2월 이 학교를 졸업한 문정수(67)씨가 고3 담임이었던 조현분(45) 교사를 찾아 카네이션을 달아주며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조씨는 "담임 맡았을 때보다 졸업하고 오니 훨씬 반갑고 건강한 모습이어서 보기 좋다"고 손위 제자의 손을 꼭 잡았다.
어려운 시절 대부분이 그랬듯 7남매 중 둘째였던 문씨는 가난 탓에 국민학교(초등학교) 밖에는 나오질 못했다. 17세에 고향인 경북 경주에서 홀로 상경해 가락시장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돈을 벌어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학업보다는 당장 먹고 사는 게 문제였다.
약간씩 모은 돈도 동생들 뒷바라지에 쏟다 보니 정작 자신에게 돌아오는 건 없었다. 28세에 결혼한 뒤에는 자식들(3녀1남) 키우느라 세월은 또 속절없이 흘렀다. 문씨는 "자식들을 번듯하게 키웠지만 그래도 '내가 못 배운' 한(恨)은 어쩔 수가 없더라"고 말했다.
큰 딸 반미경(37)씨 권유로 꾹꾹 눌러왔던 꿈을 다시 꺼내든 건 2007년. 늦게 시작한 만큼 중고등 과정 4년간 주말 특별수업에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조 교사는 "몇 십 년 만에 벼르다 온 분들이 대부분이지만 집안일 등 사정이 생겨 그만두는 분들도 있는데, 지각 한번 하시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분이었다"고 문씨를 기억했다.
문씨는 "노력하는 만큼 결과는 돌아온다고 믿고 통학하는 3시간동안 전철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며 "집안일 소홀히 한다는 핀잔을 듣기 싫어 오전 2시 전에 잠든 날이 별로 없었다"고 했다.
예기치 않은 불행이 닥치기도 했다. 첫 학기가 끝날 무렵 가슴 한 쪽이 묵직해 찾아간 병원에서 유방암 2기 진단을 받은 것. 1년 넘게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머리카락도 많이 빠졌지만 책을 놓지는 않았다. 그 시절 문씨는 교사나 다른 학생들 사이에 '모자 쓴 언니'라 통했다. 이선재(75) 교장은 "힘든 상황을 잘 이겨내고 무사히 졸업해 오히려 교사들이 고마워하는 분"이라고 치켜세웠다.
현재 김포대 부동산경영학과 새내기인 문씨는 "평생 못할 줄 알았다가 다시 선생님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었다"며 "대학원에도 진학해 부동산 관련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당연히 내년 스승의날에도 와야죠. 예순 넘어 만났지만 저한테는 '평생 선생님'들입니다." 얼굴 가득 퍼진 미소는 마치 여고생 같았다.
이성기 기자 hang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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