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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사흘간의 동행] <18> 국립발레단 공연 백 스테이지와 연습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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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사흘간의 동행] <18> 국립발레단 공연 백 스테이지와 연습실

입력
2011.05.11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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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했나?" 백스테이지에서 발레리나 허다정(25)씨가 배를 움켜잡고 괴로워한다. 튀튀(발레리나가 착용하는 주름 잡힌 치마) 차림의 코르드발레(군무를 추는 무용수) 여럿이 허씨 주변으로 모여든다. 한 마리의 백조를 여러 마리 백조가 둘러싼 것 같은 모습이다. "마음 편하게 가져." "힘내." 여기저기서 응원의 목소리가 쏟아진다.

허씨는 백스테이지에 오기 전 복도에서 입단 동기 김종렬(24)씨에게 양손을 바늘로 따는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영 편치 않아 보였다. 사실 그가 배가 아픈 것은 뭘 잘 못 먹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대에 오르기 전 공포감이 이런 증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잠시 후 다리막(본 무대 양옆에 세로로 걸려 수평 시각선을 가려 주는 막) 뒤에서 코르드발레들 틈에 끼어 나갈 순서를 기다리던 허씨는 여전히 허리를 굽힌 채 힘들어 했다. 하지만 음악이 시작되고 막이 오르자 허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으로 무대를 향해 뛰어든다.

어린이날이었던 5일 오후 5시30분께 국립발레단의 '코펠리아' 공연이 열린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무대 뒤 풍경이다.

수면 아래서 분주한 백조

우아한 모습으로 물위를 떠다니지만 수면 아래서는 발짓에 분주한 백조. 무대 뒤를 분주히 오가는 무용수들의 모습이 딱 이렇다.

1막이 끝난 직후 임성철(33)씨가 눈썹을 휘날리며 대기실을 향해 뛰어가더니 다시 엄청난 속도로 백스테이지로 돌아온다. '지금 필요한 건, 스피드'라는 광고 카피가 연상돼 기자의 얼굴에선 저절로 웃음이 새 나왔다. 임씨의 손에는 흰색 밴드가 들려 있었다. 한 동료는 "2막에서 남자 무용수가 부츠에 차는 액세서린데 앞 공연 동료와 같이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귀띔했다. 무대 뒤의 무용수들은 소품을 찾고 의상을 준비하느라 늘 이렇게 바빴다.

앞서 오후 2시께 인형인 코펠리아에게 숨을 불어넣어 사람으로 만들려는 괴짜 코펠리우스 박사 배역으로 출연을 앞둔 정현옥(38)씨는 라면으로 점심식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는 오전 10시께 예술의전당 연습동 연습실로 출근해 11시께부터 90분 가량 수업(class)을 받으며 몸을 풀었다. 수업 뒤 남아서 부족한 부분을 조금 더 연습하다 보니 낮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인 구내식당 점심식사 시간에 맞추지 못했다. 단원들은 이렇게 라면이나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기 일쑤다.

발레리노 대기실은 군대 내무반(?)

발레리노 대기실은 라면 냄새만큼이나 사람 냄새가 풍겼다. 오후 2시께부터 시작된 앞 공연에서 코펠리우스 박사 역할을 했던 이수희(34)씨가 4시30분께 무대의상인 모자와 양복을 입은 채 땀에 절어 대기실로 들어왔다. 무대화장을 하고 머리를 만지며 공연을 준비하던 선ㆍ후배 발레리노들은 일제히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다"고 이씨를 격려했고, 그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으로 이에 답했다. 고된 경계근무를 마친 병장이 내무반에 돌아오면 선ㆍ후임이 인사를 건네는 군대 내무반 풍경과 비슷했다. 다음 공연에서 같은 가발을 써야 하는 정현옥씨에게 미안했던지 이씨는 가발에 청정제부터 뿌렸다. "형, 어쩌죠?"

발레리노 정영재(25)씨는 "개그콘서트의 '발레리N0'가 발레리노를 희화하기는 했지만 처음 타이즈를 입을 때 쑥쓰러웠던 경험을 떠올리며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큰 웃음이 나온다"며 "발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인다는 면에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들은 걱정이 많은 사람들이다. 40세 전후에 은퇴를 한 뒤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부터 발레를 뒤로 하고 군에 입대해 2년을 보내면 몸이 굳지 않을까 하는 고민까지 듣고 있자니 기자의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였다.

발레리나의 발

부슬비가 내리던 6일 오후. 전날 '코펠리아'공연에 참가했던 무용수들 가운데 6명은 축축 쳐지는 몸을 이끌고 연습실에 모여 있었다. 또 다른 공연 연습에 한창인 연습실에는 무대 소품인 소파가 놓여 있다. 이들은 토슈즈나 슈즈를 신지 않고 맨발로 춤추고 있었다.

바로 20일 개막하는 창작 발레 '컨버댄스'의 일부인 'J씨의 사랑 이야기' 연습이었다. 이 작품은 연극 '33개의 변주곡'을 모티프로 한 창작 발레. 현대무용이 바탕이어서 토슈즈나 슈즈를 착용하지 않고 공연해야 해 발이 무척 아프다. 또 몸짓이 클래식 발레와 완전히 달라 원래 쓰지 않던 근육을 섬세하게 움직여 가며 연기해야 하기 때문에 몸이 받는 창작의 고통 역시 크다.

"팔 잡으면 여자가 뿌리치고 턴." 발레리노 정현옥(38)씨의 안무에 맞춰 발레리나 박나리(28)씨가 춤을 춘다. 그런데 갑자기 '억'하며 쓰러진다. 발이 접질린 것이다. 상대역인 발레리노 서재민(27)씨가 어디선가 얼음주머니를 가져와 박씨의 발목을 감쌌다. 선배 발레리노 이영철(34)씨도 곁으로 다가와 "괜찮냐"고 묻는다. "붓지는 않았어요. 괜찮아요."

정씨가 다시 분위기를 추스르고 연습을 재개시킨다. "자, 자, 힘내고." 맨발의 무용수들은 그의 지도에 다시 짝을 맞춰 뛰고 구른다.

발레리나의 엄지발가락 안쪽 뼈는 대부분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발을 바깥쪽으로 돌리는 턴 아웃 동작 등을 수없이 하다 보니 발가락이 휘는 무지외반증을 얻는 것이다. 한 발로 서는 포인트 동작으로 발톱이 빠지는 것도 예사다. 또 바닥에 쓸려 정강이뼈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인대가 파열되기도 한다. 무릎 등에도 각종 통증을 달고 산다.

발레리나 김리회(24)씨는 "발 골절로 2008년 6개월간 쉰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쉬니까 좋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대에 서고 싶어 안달이 났다"며 "무용수 대부분은 부상을 달고 살지만 무대에 오르기만 하면 모든 고통을 잊고 춤을 계속 춘다"고 말했다.

매일매일 도 닦기

"원 앤 투 쓰리 포." 9일 오전 11시께 국립발레단 단원 17명은 다시 예술의전당 연습동 국립발레단 스튜디오에 섰다. 하루라도 아무 생각 없이 쉬면 "몸이 굳는다"고 여기는 이들은 오자현(37) 지도위원의 리드와 피아노 반주에 맞춰 기본동작 1~6번을 중심으로 몸을 풀며 오후 리허설을 준비했다. 발레단의 올해 공연일은 130여일. 3주일간의 꿀맛 같은 여름휴가를 제외하고 연습일을 포함하면 쉬는 날이 거의 없는 셈이다.

"그래도 쉬는 것보다 공연 하는 게 좋다"는 이들에게 '발레가 뭐가 그리 좋냐'고 물었다. "모든 괴로움을 잊을 수 있어서"라는 빌리 엘리어트의 영화 속 대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이영철씨는 "다른 사람의 감정에 빠져 보는 게 멋있고 고난도 동작에 성공했을 때도 정말 뿌듯하고 보람 있다"며 "어렸을 때는 30대 되면 그만둬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재미있으니 계속하게 된다"고 털어놓았다. 발레리나 박슬기(25)씨는 "발레를 초등학교 때부터 해 와 밥 먹고 잠자는 것같이 느껴진다"며 "무대에서 갈채를 받을 때 해 냈다는 보람과 환희가 계속하는 이유"라고 했다.

현대무용을 하며 얻은 무릎 부상으로 군 입대 1년 만에 의가사제대를 하고도 1999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해 현재까지 현역으로 뛰고 있는 정현옥씨는 "무용수의 삶은 매일 신체를 훈련하고 자기 생활은 거의 없는 도인과 비슷하다"며 "그런데 그 생활이 중독이 된다" 말했다.

김청환기자 chk@hk.co.kr

■ 이명재 재활 트레이너가 본 발레리나·발레리노

“아름다운 발레 동작 하나를 위해서 매일 무대 뒤에서 치열하게 숨겨진 노력을 반복하는 그들을 한번쯤 생각하고 공연을 봤으면 좋겠어요.”

국립발레단원의 크고 작은 부상에 응급조치를 하고 재활을 돕는 이명재(34) 재활트레이너의 말이다. 7일 서울 예술의전당 연습동 국립발레단 재활실에서 만난 그는 자주 웃는 편이다. 웃을 때 소리를 크게 내지는 않았지만 눈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표정을 크게 짓는 넉넉한 인상이다.

인터뷰를 하는 중에도 단원들은 크고 작은 통증으로 계속 그를 찾아왔다. “하루 평균 단원 15~30명 가량의 몸을 풀어 주거나 응급조치를 해요.” 한발로 서는 포인트 동작이 기본인 발레리나가 발목을 삐거나 뼈에 금이 간 경우는 다반사다. 점프 동작 등을 하다 인대가 파열되거나 골절을 당하는 무용수도 부지기수다. 허리 근육을 다치거나 신경성 위염 등을 앓는 경우도 많다.

가장 큰 문제는 공연 당일 부상을 당했을 때다. “뼈에 금이 갔는데도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고 테이핑을 한 채 무대에 올라갈 때도 있어요. 자신의 몸 상태를 알면서도 무대 위에서 완벽함을 보여 주려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면 안쓰러울 때가 많아요.”

웃지 못할 일도 종종 생긴다. 지난해 가을 ‘백조의 호수’ 지방 공연 때 한 발레리나가 발목을 접질렸는데 공연장 인근 편의점에서조차 얼음을 구할 수 없어 호프집에 사정을 말하고 겨우 구해 응급처치를 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무용수들이 항상 심각한 것만은 아니다. “정신력이 강하고 인내력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배역의 감정선까지 읽어야 좋은 표현과 동작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여린 사람들이 많아요. 공연을 무사히 끝내고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며 환하게 웃는 무용수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 맑은 사람들이구나’란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올해로 3년째 국립발레단에서 일하고 있는 그는 ‘나중에 자식이 발레를 하겠다고 하면 시키겠나’란 질문에 “안 시킨다”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금새 “정말 좋아서 하겠다고 한다면 시켜야죠”라고 답하며 다시 한번 큰 표정으로 웃었다.

김청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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