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피난 시절의 우리 문단은 한편으로 무시무시한 측면도 없지는 않았다. 바로 수필가이자 언론인 조경희와 시인 노천명의 경우가 그러했다.
1918년생인 조경희는 왜정 때의 이화여전 출신으로, 그 무렵 폐간 되기 이전의 조선일보 학예부에 입사, 기자생활을 시작한다. 그 당시의 학예부장은 시인 김기림이었다,
조경희는 이화여전 학생 때 벌써 조선일보에 학생 칼럼 등을 실은 연줄로 졸업하자마자 특별 스카우트 되었다고 한다. 그 생김새는 솔직하게 말해서 별로 볼 품이 없었지만, 타고 난 활달함과 빠른 말씨의 번뜩이는 재담, 그 어떤 무거운 자리도 대번에 자기 페이스로 휘어잡아버리는 순발력과 담력에 있어서만은 젊었을 때부터 남녀 통틀어 이 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 바로 조경희였다.
태어난 곳은 경기 강화.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이 있다. 깍쟁이 개성 사람이 수원 사람에게는 못 당하고, 물 속 백리를 기어간다는 그 수원 사람을 이겨먹는 것이 바로 강화 사람이라고. 조경희야말로 그 강화사람의 표본이었다.
젊었을 적부터 뛰어난 능력을 해방 직후의 이 나라 정국이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그렇게 젊은 조경희는 1947년 무렵에 벌써 명동 초입의 '명동서점' 주인 김희봉이 하던 '대중문예'지 사무실에도 부지런히 들락거리며 문인이며 화가들과도 폭넓게 낯을 익힌다. 아니, 이미 그 전부터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를 했으니 새삼 낯을 익힐 것도 없었다.
조경희로서야, 문화 예술계의 대가건 중진이건, 신인이건, 싸잡아서 모두가 자기 휘하에 있는 사람들이나 다름 없었다. 더구나 이화여전 동창이던 이은영이 그 잡지의 여기자로 있었고 그녀는 조경희와 학교적부터 단짝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은영은 그 얼마 뒤에 북한으로 넘어가는 어느 예술가와 눈이 맞아 같이 월북을 해버리지만, 그 어간에 조경희도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그네들과 전혀 무관하게 지낼 수는 없었을 터였다. 원체 해방 직후 초창기여서 좌우 인사들이 더러는 같이 어울려서 친숙하게 지내는 것도 예사로웠을 것인데, 더구나 조경희 성격으로서야 뻐언할 뻔 자 훤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실제로 그 무렵에는 그 어떤 사람을 두고서도 딱히 좌우로 분별해서 보지는 않았었다. '마돈나' 다방을 드나드는 정지용은 그냥 시인 정지용이었고 이용악도 단지 시인 이용악이었다. 그 무렵 그런 쪽의 풍속이나 관행은, 다음과 같은 일화 한 토막도 대표적인 한 사례가 될 것이다.
문화인 중에 조금 왼쪽으로 삐딱한 인사가 있어 당국이 모종의 혐의를 잡고 다방으로 찾아와 임의동행 형식으로 데려가게 되면, 그 다방에 같이 앉아있던 동료 문화인들은 푸짐하게 차려진 어느 연회 자리에 그이 혼자만 초청받아가는 줄로만 알고 썩 부러워들 하곤 했다고 한다. 하여, 심지어 혹자는 연행하러 온 그 경찰에게, 왜 그이만 데리고 가느냐, 나도 같이 따라가면 안 되느냐고 마구 떼를 쓰기도 했다던가. 그로부터 60여년이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던 호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뒤 차츰 좌우 싸움이 극도로 치열해지고 날이 갈수록 더 험악해지는 상황에서 끝내 6ㆍ25 전쟁이 터졌다. 북한군이 서울을 장악하자 조경희는 서울 구치소에 두 달 가까이나 갇혔다가 9ㆍ28 수복 며칠 전에야 겨우 풀려난다.
그런데 그 서울 수복 뒤에 조경희는 다시 노천명과 함께 잡혀서 서울 구치소에 수감되는 것이다. 그렇게 그이는 수복 뒤의 전격적인 군사재판에서 사형 언도까지 받고 다시 1ㆍ4 후퇴 때는 푸른 죄수 옷에 손목에 수정까지 찬 중죄인의 모습으로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호송되는 것이다.
그러나 남쪽의 임시수도 부산에서 드디어 귀인을 만난다. 그 귀인인즉, 바로 문학평론가 조현연 등 몇몇 사람이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노천명과 조경희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특별조치로 용케 풀려났다. 이 뒤에는 이 무렵의 막강한 실력자 모윤숙의 콧김이 작용했던 것이다.
그렇게 험한 고비를 넘기고 나서 살아 생전 말년에는, "그까짓 일, 아예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 그 무렵의 일은 너무너무 어이가 없어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며 본인부터 설레설레 고개를 젓지만 다만 이화여전 선배이자 시인인 노천명과 연루되었던 일이라는 것만은 슬쩍 내비쳤다. 그리고 그 노천명 뒤에는 이미 여간첩으로 처형당했던 김수임이가 자리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김수임 사건은 모윤숙도 이미 손을 써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던 것이었다. 노천명은 그 뒤 부산의 KBS 방송국에서 구성작가로 일을 하게 되고 조경희도 부산일보 문화부 기자로 들어가 문화부 차장, 부장까지 역임하게 된다.
사실은 북한군이 그렇게 석 달 동안 서울을 장악하고 있었을 때에는, 1970년대 초엔가 서울의 대한극장 앞에서 한밤 중에 택시에 치어 세상 떠났던 유한철씨라든가, 또한 한 때는 1930년대 이상(李箱)시인과 동거하기도 했다가 말년에 김환기 화백의 부인이 된 김향안 같은 분들도 그런 쪽으로 혐의가 있었던 것 같았으나 우물쭈물 그냥 무사하게 넘겼다고 한다.
그 무렵으로부터 60년을 지나놓고 오늘에 서서 보면 대저 난세라는 것이 별 것이겠는가. 바로 이런 것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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