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밀하고 집요한 '사이버 폭력' 피해망상·환청 등 더 큰 후유증
지방 K시의 중학교 1학년인 A군은 서울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 약한 몸 때문에 담임 교사가 특별한 관심을 보여 아이들이 A군을 때리지는 않았지만 대신 폭언과 사이버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아이들은 교실에서는 "XX도 못하는 놈", "더러운 자식" 등 폭언을 수시로 했으며, 수업이 끝난 뒤에는 "선생님이 챙긴다고 까불지 마라", "엄마한테 말하면 놔두지 않겠다"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A군이 인터넷 메신저에 접속하면 친구들은 "니가 감히 어디서 접속을 하느냐"며 욕설을 퍼붓는 등 수시로 괴롭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A군의 부모는 지방으로 이사해 학교를 옮겼으나 가해학생들은 A군이 전학 간 학교의 인터넷 커뮤니티에 악의적인 비방글을 올렸다. A군은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 준비를 할까 고민 중이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이하 청예단)에 접수된 이 같은 상담 사례들은 신체적 고통을 주는 직접적인 폭력뿐 아니라 인간적인 모멸감과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주는 폭언, 사이버 폭력의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 준다. 특히 청소년기에는 준거집단이 가정에서 또래집단으로 이동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시기에 학교 친구들부터 지속적으로 흉이나 욕을 듣게 될 경우 그 심리적 상처는 심각하다고 전문가들을 우려한다.
최근 늘고 있는 사이버 폭력의 경우 온라인이란 특성 때문에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없어 더욱 피해가 커질 수 있다. 김승혜 청예단 SOS지원팀장은 "사이버상에선 한 다리만 걸치면 대부분 아는 사이인 데다 촘촘히 연결돼 있어 왕따 때문에 외국으로 이민을 가도 소문이 그곳까지 퍼지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손석한 연세소아청소년정신과 원장은 가장 심각한 유형이 '집단 무시'라고 지적한다. 한 고3학생은 손 원장을 찾아 "교실에 들어가면 아이들의 대화가 뚝 끊깁니다. 그리고 자기 발 밑에 침을 뱉는데, 그게 사실은 나를 향해 뱉은 것이라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라고 하소연했다. 이런 경우 피해자의 심리적 상처는 매우 크지만 피해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제재하기도 힘들다.
교육과학기술부와 법무부는 이미 2008년부터 ▦별명 부르기 ▦험담하기 ▦빈정거리거나 조롱하기 ▦나쁜 소문 퍼뜨리기 ▦위협적인 행동(여러 학생이 한 명의 학생을 향해 반복적으로 하는 윙크도 포함) ▦음란한 눈빛과 몸짓 ▦행동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찍어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것 ▦인터넷 카페나 학교 게시판에 협박 글을 올리는 것 등을 학교폭력으로 예시하고, 이를 예방하도록 일선학교에 지침을 보냈다.
하지만 가해학생들은 대부분 "이런 행동을 학교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대답한다. 올 초 휴대전화를 통한 '사이버 왕따'에 대한 실태조사를 벌였던 고려사이버대 전신현 교수와 숭실대 이성식 교수 연구팀은 학생들이 휴대전화로 집단 괴롭힘을 가하는 이유로 재미와 쾌락,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분노 해소, 타인에 대한 지배욕 충족 등을 들었다. 연구팀은 "휴대전화 집단 괴롭힘 피해 경험이 있는 학생들은 자신도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손석한 원장은 "학교 체벌금지 이후 학생들 사이의 신체적 괴롭힘은 줄어들었으나, 대신 언어ㆍ심리적 폭력 피해 청소년들이 병원을 찾는 빈도는 한 달에 2~3명 꼴로 늘고 있는 추세"라며 "언어ㆍ심리적 폭력의 심각성에 대한 교육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승혜 팀장은 홀아버지 밑에서 자란 한 학생이 초등학교 때부터 지속적으로 집단 언어폭력에 시달리다가, 중학교 때 '모든 친구들이 자기를 해치려 한다'는 망상으로 상태가 악화된 후에야 아버지 손에 이끌려 청예단을 찾았던 예를 들며 언어폭력의 심각성을 설명했다. 이 학생은 4년간의 지속적 상담을 거친 후에야 사회생활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고 대학 진학에도 성공했으나, 망상은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 군대에 갈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김 팀장은 "사이버 폭력, 언어 폭력의 피해 학생들은 숨어서 인터넷을 한다거나 문자나 전화가 오면 과민반응을 보이고, 심각한 경우엔 욕설이 들리는 환청을 경험하기도 한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이상행동을 하지 않는지 주의 깊게 관찰해야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조금이라도 일찍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준규기자 manbok@hk.co.kr
■ 상위클래스·평민·찐따·종 학생 간에 '권력 피라미드'
"어떻게 아이들 사이에서 상위클래스 평민 찐따 종 등의 호칭이 오갈 수 있는지,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어요."
서울 한 초등학교 교사 A(33)씨는 최근 담당 학급에 학생간 권력계급이 있다는 것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 한 학부모가 '자녀가 맞고 있다'는 학교폭력 신고를 접수했고, 이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이런 사실을 알게 됐다.
가해자로 지목된 B군(11)은 여러 해 반장을 맡아 교사들 사이에서도 신뢰가 두터운 학생이었다. A교사가 사태파악에 나서자 아이들은 B군이 피해학생을 1년 넘게 때려왔고 '찐따'등으로 부르며 '종 부리듯'심부름을 시켜왔다고 고백했다. 자리 청소하기, 간식 사오기, 준비물과 교과서 빌려오기, 화장실에 따라와 휴지 들고 서있기 등 괴롭힌 정도가 심각했다.
A교사를 더 경악시킨 것은 "걔는 원래 '찐따'라서 무시당해요"라며 폭력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다수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학생들은 교실 안에 소위 상위급, 하위급 클래스라는 자신들의 분류가 존재한다고도 말했다. 상위급 클래스는 집안 환경과 교사의 인정을 바탕으로 학교폭력 가해학생들의 보호까지 받는 부류로 '1짱'이라 칭하고, 하위급 클래스는 약해 보이고 소심하고 행색이 추레한 아이들로 다수 학생들이 '찐따, 종' 등의 호칭을 불러 무시한다는 것. 이렇다 보니 성적이 낮은 학생들이 주로 학교폭력 가해자가 된다는 옛 공식은 깨져있었다.
"당하는 애가 불쌍하다고 말리거나 도와주면 같이 종 취급 받는다"는 말까지 듣고 나니 A교사는 작년부터 괴롭힘 당하는 학생을 보고만 있었던 많은 학생들의 행동이 이해됐다. 난감해진 A교사는 최근 '함께 살기 교육'등을 자주 하려 애쓰고 있다. 하지만 효과가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오지연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따돌림사회연구모임 사무국장은 "학생들에게 학급 권력관계를 그려보라 말하면 주로 가해학생을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 구조를 그려낸다"며 "다수 학생들은 폭력상황을 방관하면서 함께 그 피라미드를 지탱하게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권력 피라미드가 형성되는 까닭은 다양하다. 교사나 또래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좌절된 학생들이 집단에서 무의식적으로 '제일 힘 센 애', '남을 부려먹을 수 있는 애'등의 왜곡된 명예도 가지려 애쓰고, 자신도 모르게 권력 피라미드를 만든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경제적 능력을 기준으로 한 성인들의 양극화를 본떴다는 해석도 있다.
오 국장은 "배려 우정 존중 등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인 학교에서조차 학생들이 늘 남을 괴롭히고 무시하는 폭력 상황에 노출되고 있는 셈"이라며 "인성교육 등 생활교육에 대한 총체적인 보완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 해외서도 '사이버 괴롭힘' 사회문제로 부상
학생들의 가슴을 멍들게 하는 사이버 따돌림, 폭력 등은 비단 국내 교육현장의 문제만은 아니다. 독일 미국 영국 등에서도 초중고생, 심지어 대학생 간 사이버 괴롭힘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라 교육당국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운영사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올 3월 독일 베를린에서는 17세 남학생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여자친구를 비방하던 학생들에게 항의하기 위해 오프라인에서 만났다가 20여명에게 집단폭행을 당해 혼수상태에 빠지는 일이 벌어졌다. 권남희 방송통신위원회 독일 통신원은 "독일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쓰는 소셜네트워크 사이트 슐러, 페이스북 등에서 집단 괴롭힘 사례가 많이 보고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미국에서는 럿거스대 1학년생의 동성애 장면이 인터넷에 공개되면서 수치심을 이기지 못한 해당 학생이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 사이버 괴롭힘 연구센터 2010년 조사에서도 10~18세 4,400명 중 20.8%가 사이버 괴롭힘의 피해자가 되거나 가해자가 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미 사이버안전 전문가들은 사건 직후 온라인상에 사진 게재를 주의하고, 괴롭힘을 당할 때 반드시 부모와 상의할 것을 권고했고, 교육당국은 이를 토대로 대책 마련에 나섰다.
페이스북 역시 지난해 10월부터 사이버 괴롭힘 가해자들이 가짜 계정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가짜 계정 이용자의 명단을 관리하는 등 사이버 폭력 관련 대책 마련에 고심 중이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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