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의 여당에 대한 장악력이 너무 이른 시점에 약화했다는 분석이 정치권에서 나오고 있다. 4ㆍ27 재보선 패배 이후 쇄신 바람에 비주류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탄생하는 흐름 등을 두고 하는 말이다.
특히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역대 정권과 비교해봐도 당 장악력 약화 시기가 너무 빠르다는 분석이다. 물론 역대 정부도 집권 4년차부터 임기 말 증후군이 있었다. 다만 '대통령의 여당에 대한 장악력'이라는 측면으로 한정해 본다면 이명박정부와 역대 정부의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선 최근 여권 상황으로 보면 당에 대한 이 대통령의 영향력이 점점 약화할 것이라는 시각에 이견이 없다. 원내대표를 비주류에게 뺏긴 것은 주류의 힘이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당장 황우여 원내대표는 청와대, 정부와 각을 세우는 행보를 하고 있다. 이는 주류의 양대 축을 이뤘던 이상득계와 이재오계의 결별 등 친이계의 분화로 인한 결과다. 때문에 대통령의 레임덕(권력누수) 본격화 시기가 빨라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물론 "당 대표를 뽑는 조기 전당대회를 거치면서 상황이 또 달라질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현정부의 이 같은 현상은 과거 정부와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노태우정부는 집권 4년차인 1991년 '수서비리'가 터지면서부터 국정 장악력이 약화했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은 90년 3당 합당 후 민자당 대표 자리를 자의로 당시 김영삼 대표에게 줬고, 이후 자연스럽게 김영삼 대선후보로 힘이 실리는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당 장악력 약화 문제를 따지기 어렵다.
김영삼 대통령의 경우 96년 말 '노동법 날치기 파동'과 한보사태 등으로 권력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이어 97년 3월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 취임 시점을 전후해 여당의 지휘봉이 청와대에서 이 대표로 사실상 넘어가게 된다. 이후 김 대통령은 이회창 대선후보와 갈등을 겪다 97년 11월 7일 탈당했다.
김대중 대통령도 집권 4년차 가을부터 진승현ㆍ정현준ㆍ이용호 게이트와 아들 비리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당내 권위는 큰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정풍운동' 등 신주류_구주류간 내분도 심각했지만 김 대통령이 직접 공격받진 않았다. 확실한 지역 기반과 정치적 무게감 때문이었다. 집권 5년차인 2002년 5월6일 탈당한 이후에야 김 대통령의 당내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가장 심한 레임덕에 시달렸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창당 때부터 당청(黨靑) 분리를 엄격히 강조하면서 당을 장악하려 하지 않은 특징이 있다. 당시 당은 사실상 정동영계와 김근태계가 양분해 친노계와 공동으로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정희 한국외대 교수는 "이 대통령의 당 장악력 약화 시기가 빨라진 것은 총선과 대선이 같은 해 실시되는 정치 일정과 관련이 있다"며 "총선에서 살아남는 게 지상과제인 의원들이 총선이 다가오면서 청와대와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녹용기자 ltree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