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0년 영국의 청교도 102명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 동북부 해안에 도착했을 당시 미 대륙에는 최소 2,000만, 최대 4,000만 명의 인디언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 미 대륙에는 25만명 정도가 인디언 보호구역 등지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 많은 인디언은 어디로 갔을까. 몇 해 전 번역 출판된 (디 브라운 저, 최준석 옮김)는 200여 년에 걸쳐 자행된 인디언 학살사를 다루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미국이 자랑하는 서부개척사의 다른 이름은'인디언 멸망사'다.
■ 이 책은 1890년 벌어진 마지막 인디언 학살극'운디드 니'사건이 중심이지만 서부개척시대 백인들의 약탈과 학살, 강제이주에 맞서 싸운 전설적 인디언 전사들의 얘기가 소개된다.'붉은구름''앉은 소''매부리코''작은 까마귀'등이 그들이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넘나들며 신출귀몰한 저항을 펼쳤던 아파치족 전시추장 제로니모도 그런 전사의 한 사람이다. 부족이 지어준 본명은 '하품하는 사람'(고야틀레이)이었다. 1829년 멕시코서 태어난 그는 아내와 자녀 3명이 멕시코군에 살해된 뒤 저항과 복수의 화신이 됐다.
■ 제로니모라는 이름은 인디언을 끔찍이 싫어한 신부를 가톨릭 성인 제로니모 축일 행사에서 화살로 쏴 죽이고 바람처럼 사라진 뒤 멕시코인들이 붙였다. 30여년 간 무수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인디언에겐 영웅, 백인에겐 공포의 저승사자였다. 단 19명의 전사를 이끌고 미군 기병 5,000명에 치명타를 입히기도 했다. 대대적인 토벌에 몰려 결국 항복한 후 알코올 중독에 빠져 지내다 1909년 한 많은 일생을 마쳤지만 신화는 계속됐다. 미군 공수부대원들은 비행기 낙하 때'제로니모'를 외치고, 그의 리더십과 지혜는 현대의 성공전략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 그의 이름을 미군 특수부대가 오사마 빈 라덴 제거 작전명에 붙였다고 인디언 사회가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 미군 당국은 제로니모가 빈 라덴을 뜻하는 게 아니라 전체 작전명이라고 해명했으나 군색하다. 미국사회의 주류인 WASP(백인앵글로색슨계 신교도)의 뿌리깊은 반 인디언 잠재의식이 제로니모와 비슷한 면모를 보인 빈 라덴에 투사됐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한 칼럼니스트는"흑인 대통령이 백악관에 입성했어도 인디언을 미국의 적으로 간주하는 200년의 전통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가해자들의 끈질긴 인종편견을 다시 확인한 인디언들의 심정은 오죽할까.
이계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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