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호수에서 물안개를 맞는다. 희붐한 여명이 호수를 감쌌다. 호수엔 정한 물 위로 길게 물그림자 늘어뜨린 집들이 떠있다. 수상 좌대다. 호수의 아침은 태양보다 먼저 새들의 지저귐으로 찾아왔다. 싱그러운 초록의 숲에서 튀어나온 싱그러운 지저귐. 이제 막 눈 뜬 새들이 제 얼굴을 호수에 비춰 보려는 듯 낮게 물 위를 스친다. 호수를 향해 삼각대를 설치하고 카메라를 걸어 놓았다. 이따금 터지는 그 셔터 소리가 호수의 고요를 깨뜨릴까 조심스럽다.
가늘게 분분이 피어올라 부드럽게 살랑이는 물안개가 곱다. 호수에서 하늘하늘 솟아오른 가는 실타래 같은 것이 솜처럼 풀어지며 수면 전체로 번져나간다. 날이 점점 밝아오며 안개가 엷어진다.
물안개 넘실대는 호수에선 이따금 작은 동그라미가 그려진다. 물고기들이 물 위로 머리를 내밀며 만드는 파문이다. 물오리가 안개와 숨바꼭질하다 수면 위에서 날개를 털어대는가 하면, 쌀가마니 만한 왜가리가 호수 위를 가르며 커다란 날갯짓을 해댄다.
수상 좌대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방문을 열고 나온 강태공이 눈을 비비며 제일 먼저 좌대에 걸쳐놓은 낚싯대부터 확인한다. 수상 좌대에서 밤을 보낸 저 강태공. 지난 밤 그는 무엇을 낚았을까. 물고기를 걷어 올렸을까, 상념을 걷어 올렸을까. 부수수한 강태공의 움직임은 호수의 안개만큼이나 느릿느릿했다.
강태공의 지난 밤이 부러웠다. 모두와 단절된 물 위의 집에서 컴컴한 밤 그가 느꼈을 고독이 부럽고, 그 고독을 감싸주었을 물안개의 위로도 부럽다.
경기 안성의 고삼저수지의 아침 풍경이다. 사위가 밝아지며 호수에 초록을 늘어뜨린 숲의 신록이 더욱 선명해진다. 숲과 수상 좌대의 물그림자가 더 선명하고 길어진 것을 보니 어느덧 물안개도 많이 엷어졌나 보다.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고 아침은 더욱 부산스러워졌다. 마침내 호수를 감싼 산자락 위로 해가 떠올랐다. 빛을 받은 호수 위에서 물안개가 요동을 친다. 하루 중 가장 급박하게 사물이 바뀌는 순간이다. 물 위로 안개가 사그라지는 게 확연하다. 물안개가 호수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수상 좌대와 물안개가 빚어내는 고혹적인 새벽 풍경을 담은 고삼저수지는 1963년 완공된 277㎡(84만평) 규모의 호수다. 주변에 오염원이 없어 수질이 깨끗하고 수초가 많아 붕어 잉어 배스 등 씨알 굵은 물고기의 입질이 잦다. 저수지를 감싸고 있는 향림 삼은 양촌 꽃미 등 마을에 낚시터가 즐비하다. 수상 좌대만 130개가 넘는다.
고삼저수지 한가운데는 보통 저수지에서 보기 드문 섬이 있다. 호수가 되기 전 동네 뒷산이었을 언덕이 물에 잠기며 만들어진 섬이다. 8자 모양의 팔자섬, 용이 나왔다는 것을 기리는 비석이 있어 비석섬, 동그랗게 생긴 동그락섬 등 세 개의 섬이 떠있다. 꽃뫼로도 불리는 꼴미는 물 속에 뿌리를 박고 선 10여 그루의 버드나무들로 청송 주산지의 느낌이 흠씬 묻어난다.
수상 좌대는 물고기를 낚는 낚시꾼뿐 아니라 고즈넉한 분위기에 머리를 식히러 온 이들이 많이 찾는단다. 목선을 빌리면 노를 저어가며 호수를 둘러볼 수 있다. 물가 버드나무에선 새순이 돋고 숲 속 산벚나무에선 하얀 봄이 꽃망울로 터져 나온다.
향림마을의 금터좌대(031-674-3642)의 경우 수상 좌대 1박에 3명 기준 6만원. 노 젓는 배는 2만5,000원, 모터 달린 배는 4만원에 빌릴 수 있다.
안성=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봄안개가 아름다운 저수지들
물안개 살랑이는 호수가 한창 아름다울 때다. 신록과 산벚꽃 등이 호수 위로 봄 냄새를 잔뜩 퍼뜨릴 때다. 고삼저수지 말고 새벽 풍경이 아름다운 호수들을 소개한다. 이맘 때면 사진작가들이 떼를 지어 찾는 촬영 포인트들이기도 하다.
청송 주산지
경북 청송 주왕산 자락에 있는 저수지다. 조선 숙종 때(1720년) 둑을 쌓기 시작해 1년 만에 완성했다는 이 연못은 계곡 아래 논과 밭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저수지였다. 길이 100m, 폭 50m의 학교 운동장만한 크기다. 규모는 대단치 않지만 한 번도 물 마른 적이 없었다.
주산지가 유명해진 건 초록 물 속에 뿌리를 박고 선 30여 그루의 왕버드나무 때문이다. 100년이 넘는 고목들로 신산의 세월이 울퉁불퉁한 줄기에 스며 들었다. 30여년 전 저수지의 수위를 높이면서 수몰된 나무들이다. 고삼저수지가 영화 '섬'의 무대였던 것처럼 주산지는 영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의 촬영지로 유명해졌다.
화순 세량지
화순 세량지는 독특한 색깔과 구도를 지닌 저수지다. 삼나무 산벚나무 버드나무 등이 정한 물과 함께 어우러져 수채화를 연상케 하는 풍경을 지녔다. 전남 화순읍의 작은 저수지 세량지가 입소문을 탄 것은 2006년부터다. 저수지 주변 산등성이의 대형 송전탑과 전깃줄, 호수 위 산자락의 큰 묘지 등이 풍경에 방해가 되긴 하지만, 뾰족한 삼나무와 미동 없는 호수 등이 빚어낸 풍경은 "이곳이 우리나라인가" 싶을 정도로 이국적이다.
서산 용비지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충남 서산의 마애삼존불과 개심사 사이에 있는 저수지다. 세량지보다는 크다. 물 한가운데에 탑이 서있다. 저수지 가장자리로 산벚꽃이 많이 피어난다. 세량지와 비교해 송전철탑이나 무덤이 없어 전경이 깔끔하다. 일부러 프레임에서 잘라내야 할 풍경의 군더더기가 없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