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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격 인터뷰] 조계종 화쟁(和諍)위원회 위원장 도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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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격 인터뷰] 조계종 화쟁(和諍)위원회 위원장 도법스님

입력
2011.05.05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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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정부 불편한 관계 오히려 좋은 일일 수도…그래야 스스로를 되돌아보지"

부처님 오신 날이 눈 앞에 다가왔다. 인간 세상에 평화와 자비를 주기 위해 부처님이 오신 것이니 이 날은 큰 기념일이자 축일이다. 그런데 이 땅의 불자들은 이 날을 앞두고도 어딘가 개운치가 않다. 최근 몇 년 동안 박탈감과 소외감을 느꼈기 때문일 텐데, 그것으로 인해 정부·여당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진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지난해 말 템플스테이 예산이 삭감된 뒤 불교계가 정부 측 인사의 사찰 출입을 막아선 것을 보면 그들의 서운함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부처님 오신 날의 의미를 듣고 불교와 정부·여당의 관계를 묻기 위해 지리산 실상사의 회주 도법스님을 만났다. 생명평화운동에 매진해온 그는 얼마 전 한나라당 의원들이 조계사에서 법회를 할 때 법사로 그 자리에 참석했다.

지난해부터 조계종 화쟁(和諍)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스님은 조계사에서 열리는 화쟁아카데미에 참석하기 위해 매주 서울로 올라오는데 인터뷰는 그의 상경에 맞춰 조계사에서 이뤄졌다. 스님은 적절한 비유를 들어가며 구체적인 언어를 통해 불교와 한국 사회에 대한 생각을 드러냈다.

_지난해 말부터 정부·여당 관계자의 사찰 출입을 막았는데, 4월 19일에는 한나라당 불자회 인사들이 조계사에서 법회를 열었다. 조계종과 정부·여당의 껄끄러운 관계가 이제 해소된 것인가.

"내가 종단 입장을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양측의 불편한 관계가 풀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날 법회는 한나라당의 불자 국회의원들이 신행(信行) 활동으로 조계사 법회를 하고 싶다고 해서 이뤄진 것이다. 한나라당 불자회 대표인 이인기 의원이 내게 전화해 그런 뜻을 전하고 내가 법사로 나서주기를 원했다. 어찌 보면 난처한 일일 수 있어서 신경이 쓰였지만 종단 구성원으로서 곤욕스럽더라도 울력하는 심정으로 법회에 나섰다. 분명한 것은 그날 법회가 정부와 조계종의 관계를 푸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냥 신행일 뿐이다."

_그날 법회에서 도법 스님이 정부·여당과 조계종이 각자 가야 할 길을 제대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가 불편해졌다고 했다. 일부에서는 스님이 한나라당 사람들을 나무랐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정부와 종단이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내가 볼 때 그런 관계는 양측의 부적절한 관계 때문에 나타났다. 국가와 정부는 국민의 이익과 평화,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 불교 역시 중생의 이익, 평화,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 존재 이유가 같다. 국민과 중생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려면 양쪽이 손을 잡는 게 옳다. 그런데 정부·여당도, 불교계도 국민과 중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각자 자기네 이익을 챙기기 위해 관계를 맺었다. 그런 부적절한 관계 때문에 냉소, 불신, 비판을 받았다. 이제 그런 관계는 청산하고 정상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_어떤 것이 정상적인 관계인가.

"국민과 중생의 이익, 행복을 위해 정부·여당은 정부·여당대로, 불교는 불교대로 할 일이 있고 둘이 함께 할 일도 있다. 법회에서 그것을 하라고 했을 뿐이다."

_양측 모두 국민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한다고도 하지 않았나.

"대통령이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진이 있지 않았나. 무릎 꿇는 것은 진정성을 상징한다. 그러니 국민과 중생을 위하겠다면 무릎 꿇고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조계종단은 이미 자성과 쇄신 결사를 하겠다고 했다. 정부·여당도 그에 맞춰 정상적인 길을 회복해야 한다고 본다."

_그렇게 하면 불편한 관계가 해소될 수 있는가.

"그렇다. 그렇게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_원래 정치세력은 이익을 챙기게 마련이다. 양 측의 관계가 이 정부 들어 더 불편해진 것이 사실 아닌가.

"양측의 사이가 좋더라도, 국민이 평화롭고 행복하지 않다면 옳은 일이 아니다. 오히려 국민에게는 불교와 정부의 관계가 나빠진 것이 좋은 일일 수 있다. 그래야 양측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정상적인 길로 돌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_그날 법회를 맡은 것이 화쟁위원장으로서의 소임과 관계가 있는가.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_그러면 화쟁이란 무엇인가.

"위대한 사상가 원효스님의 사상이 바로 화쟁사상인데 장님 코끼리 만지기로 비유할 수 있겠다. 장님들이 코끼리의 전모를 모른 채 서로 자기가 아는 코끼리가 진짜 코끼리라고 우기며 싸운다. 누구는 코를 잡고 그것이 코끼리라 하고, 누구는 다리를 잡고 그것이 코끼리라고 주장한다. 원효스님은 장님들로 하여금 코끼리의 전모를 파악하게 하면 싸움이 끝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전모를 다 보는 게 쉽지는 않으므로 전모를 아는 누군가가 코끼리가 이런 것이라고 설명하고 이해시켜서 그들이 그것을 인정하도록 하면 싸움이 멈출 것이라고 했다. 화쟁위원회의 역할도 그렇다. 자기가 보는 일부를 전부인 것처럼 여기지 않고 그래서 상대의 생각을 인정하도록 하면서 대화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_왜 화쟁이 필요한가.

"우리 사회는 동족상잔과 남북분단으로 60년 세월 동안 갈등을 겪고 있다. 남한 내부에서도 지역과 종교에 따라 편가름이 이어지고 있다. 이제 그런 편가름을 치유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다행히 조계종 현 집행부가 출범하면서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겠다며 화쟁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지난해 봉은사 문제와, 4대강 문제를 첫 의제로 다뤘다."

_화쟁위원회라고 하더라도 조계종단의 한 위원회일 뿐이다. 그렇게 큰 일을 할 수 있을까.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겠다는 게 화쟁위원회다. 문제의 실상을 함께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면 조정이 가능해진다. 물론 화쟁위원회 자체는 힘이 없다. 그렇지만 조계종단의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우리 위원회도 힘을 가질 수 있다. 화쟁의 대상이 국가와 사회 문제라면 이웃 종교와 함께 해야 한다. 작년 4대강 문제 때도 그랬다. 가톨릭 쪽은 함께 하지 못했지만 개신교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및 원불교와 함께 토론하고 소위원회도 구성했다. 토론회에는 국토해양부의 장관과 4대강 추진본부장 그리고 여당의 사무총장이 처음으로 참석했으며 민주당 측 인사, 목사, 교무, 스님 등이 함께 했다. 그러다가 여당이 예산을 날치기 통과시키면서 엉뚱한 국면으로 접어들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런 일이 있다."

_올해는 어떤 일을 할 건가.

"두 가지 의제를 정했다. 종교갈등을 넘어 종교평화를 이루자, 남남갈등을 넘어 남남평화를 이루자. 부처님 오신 날 지나면 이웃 종교에 그런 뜻을 알리고 함께 하자고 할 계획이다."

_이 두 의제에 대해 타 종교는 어떤 입장인가.

"개신교가 진보, 보수로 나눠져 있어서 그쪽이 어떻게 나올지가 중요하다. 다른 종교는 그런 주제로 충분히 함께 할 수 있다고 본다. 개신교와만 대화가 되면 제도권 종교계가 다종교 다문화 사회의 종교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_남남평화는 무엇인가.

"결국은 남북문제다. 남북문제에 대한 태도와 관점은 정략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다. 정파를 떠나 기본 방향과 기조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합의가 필요하다. 그러면 어느 쪽이 집권하더라도 그 방향을 유지하는 선에서 남북문제를 다룰 수 있다고 본다. 남북문제에 총론적인 합의를 할 수 있도록 제도권 종교계가 나서겠다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종교계가 마음 먹으면 못할 것도 없다."

_현재의 조계종 총무원 체제와 도법스님 사이에서 일치감 같은 것을 찾기 어렵다는 사람들이 있다. 왜 화쟁위원장을 맡았나.

"자승 총무원장과는 잘 모르는 사이다. 같이 살아본 적도, 같이 일을 한 적도 없다. 하지만 화쟁위원장이라는 자리는 총무원장과는 관계가 없다. 나는 같은 민족 구성원이면서도 편 갈라 싸우는 것이 늘 안타까웠다. 화엄사상, 원효사상을 공부하면서 더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조계종단이 제도권 안에서 화쟁이라는 이름으로 갈등을 해소하겠다고 하길래 조건 없이 수용한 것이다. 만약 시민운동 쪽에서 제안이 왔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와 현 총무원 체제가 이미지나 지내온 과정 등에서 너무 맞지 않는다며 불평을 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었다."

_화엄사상은 또 어떤 것인가.

"화엄사상으로 보면 우주는 살아있는 유기적 생명공동체다. 하나의 그물처럼 서로 의지하고 영향을 주고 받는 그런 관계로 이뤄져 있다. 유기적 생명공동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하며 그러자면 서로를 인정해야 한다. 물론 나와 너라는 그물코가 있기는 하지만 전체로 보면 한 몸이다. 이것이 화엄사상이다."

_정부와의 관계, 사회문제에 대한 스님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지금의 한국 불교, 그 자체는 어떤가.

"양면성이 있다. 긍정적으로도, 비판적으로도 볼 부분이 있다."

_어떤 점이 긍정적인가.

"조선 500년 이후 생명을 유지한 것 자체가 대단하다. 조선시대에는 승려가 8대 천민에 포함됐다.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사찰 재산도 뺏겼다. 일제를 거치고 해방이 된 뒤에는 서구 문명이 밀려오면서 불교가 낡은 것, 쓸모 없는 것, 버려야 할 것, 청산돼야 할 것으로 취급받았다. 그러고도 살아 남았고 민족문화를 이어왔으니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_비판할 점은 무엇인가.

"그렇게 하다 보니 불교가 정신적으로 왜곡되고 무력해졌으며 좋은 인재도 모으지 못했다. 조선시대 지식인과 남성은 불교를 버렸다. 서산대사 같은 종교적 천재가 사상적 불꽃을 피우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부녀자, 천민, 사회적으로 쫓기는 사람이 절 집으로 들어왔다. 현대에 접어든 뒤에도 불교의 문제를 말끔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_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불교가 기복적, 무속적으로 흘렀다. 워낙 사정이 나쁘다 보니까 어려운 사람들이 절로 몰려 들어 복을 빌었다. 지금 불교는 새로운 문명의 대안으로 주목 받고 있지만 거기에 맞는 정신과 이론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자성과 쇄신이 필요하다."

_가장 시급한 자성과 쇄신의 대상은 무엇인가.

"불교 사상과 정신이 현대문명사회에서 희망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현대에 맞는 사상과 정신을 확립해 내야 한다. 그래야 종교편향 갈등도 수준 높게 다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불교 정신을 정립하려면 시간과 노력이 더 필요하다."

_기복주의와 무속 외에 불교의 물질주의도 심각하지 않나.

"지금 사회는 자본을 하느님으로 모시고 있다. 불교의 사상과 정신이 제대로 확립되지 못하면 물질주의에 휘말릴 수 밖에 없다. 불교 스스로를 위해서도 물질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불교계의 남녀 차별 등 다른 심각한 문제도 많다."

_부처님 오신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부처님 오신 날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람은 두 가지 물음을 갖고 산다. 하나는 나는 누구인가 또는 인생이란 무엇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하면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나는 이 두 물음에 대한 응답이 바로 불교라고 생각한다. 부처님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했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지금 여기 존재 자체가 가장 위대하다는 뜻이다. 석가모니가 태어난 2,600년 전의 사람들은 자연, 신, 국가와 제도에 의해 인간이 좌우된다고 여겼다. 나 자신이 인생의 주체가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인생의 주체가 나 자신이라고 한 것이다. 그것이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남자냐 여자냐, 부자냐 가난하냐 이런 것 모두 지엽적인 이야기고 세상에서 나 자신이 가장 귀하고 거룩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 자연, 권력과 제도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억압, 왜곡하는 것을 걷어치우라는 것이었다."

_그럼 불평등에 저항할 권리도 사람에게 준 것인가.

"당연하다. 내 인생은 내가 주인 아닌가."

_하지만 현실에서는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我當安之)라고, 생명을 갖고 살아가는 인간 존재가 다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불교인은 스스로 또 다른 사람이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 삶이 참되고 스스로도 평화롭고 행복해진다. 이건 불교인 뿐 아니라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도 해당한다. 부처님 오신 날은 나 자신이 소중하고 귀한 존재라는 사실, 인간 세상의 고통을 덜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날이 돼야 한다."

_노력한다고 해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늙고 죽는 것은 해결할 수 없다. 하지만 추우면 불 때고, 더우면 부채질 하며 추위와 더위를 어느 정도 이길 수 있듯 우리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도 분명히 있다. 인권신장이나 민주화 이런 것들이 다 인간의 노력 덕분 아닌가."

_편을 갈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익이 상충되기 때문에 편이 갈라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아까 말한 그물 이야기를 상기해보라. 그물과 그물코처럼, 모든 것은 서로 의지한다. 그래서 너를 부정하면 나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것이 공동운명체고 마을문화다. 마을문화라는 게 이런 거다. 마을 안에는 미친 사람도, 모자란 사람도, 괴짜도, 말썽꾼도 있지만 원수는 아니다. 야단 치고 타이르고 매도 들고 호소도 하면서 같이 지낸다. 사람 사는 곳이니 갈등이 있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_화쟁사상, 화엄사상이 모두 도법스님의 생명평화운동과 관련되는 것인가.

"그렇다. 다 연결돼 있다. 2001년 좌우대립지리산희생자 합동위령제를 개최한 것도 갈등과 대립을 풀어보자는 취지에서였다. 각 종교단체들이 100일 기도를 한 뒤 기도가 끝나는 날 지리산 뱀사골에서 위령제를 열었다. 5,000명 정도가 참가했다. 그때까지 지리산에는 좌우대립의 상처가 남아 있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갈등이 대물림되고 있었던 것이다."

_지리산운동은 언제, 어떻게 해서 시작했는가.

"2000년 즈음에 시작했다. 역사 교육을 위해 학생들과 함께 지리산 왕시루봉을 자주 찾던 이신행 연세대 교수가 지리산의 환경 파괴를 걱정하는 것을 보고 운동을 시작했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사무총장으로 있는 양재성 목사, 이학영 YMCA 사무총장 등이 그때 함께 했다. 그들과 함께 지리산을사랑하는열린연대를 발족했다. 김지하 시인, 이병철 전 귀농운동본부장, 박재일 한살림 명예회장,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처럼 지리산에서 우리 민족 정신을 찾으려 했던 사람들은 지리산공부모임을 꾸리고 있었다. 그 때쯤 지리산에 댐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어서 댐 반대 운동을 하기 위해 지리산을사랑하는열린연대와 지리산공부모임을 포함한 많은 단체들이 지리산살리기국민행동을 발족시켰다. 그리고 아까 말한 합동위령제를 지낸 뒤 2004년 봄 생명평화 전국 순례에 나서 5년 동안 걷고 얻어먹으며 주민들과 생명평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_그렇게 절실하게 생명평화운동을 한 이유가 뭔가.

"생명과 평화가 21세기의 대안으로 자리잡아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무리 물질주의가 발달해도 생명과 평화의 가치가 부정되면 갈등과 다툼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_생명과 평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당장 4대강 사업은 뭇 생명을 파괴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착착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보면 생명평화운동이 무기력한 것 아닌가.

"국가 권력이 일방적으로 가는데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 국가 권력이 얼마나 강한데. 게다가 민주주의가 제도화돼 있기 때문에 결국 현실적으로 민심은 선거를 통해 나올 수밖에 없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4대강 문제는 민주주의의 문제라고 본다. 4대강 사업을 하려면 국민 의견을 충분히 들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은 것은 결국 민주주의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분열과 갈등도 그래서 증폭됐다."

인터뷰= 박광희 편집위원 khpark@hk.co.kr

■ 도법스님

"인연 따라 된 것이다."

도법스님은 자신이 불가에 든 이유를 흘러가듯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나이 대의 한국인 대부분이 그렇듯, 그의 삶을 간단한 말로 요약해내기는 쉽지 않다.

스님은 유복자다. 제주에서 나기는 했는데 태어나기 5개월 전에 아버지가 4·3사건에 연루돼 숨졌다. 남편이 빨갱이로 몰려 죽은 상태에서, 갓 태어난 막내를 포함해 아들 셋을 키우는 어머니는 표현하기 힘든 고충을 겪었다. 삶이 고단하고 미래가 불안하니까 종교에 기댔고 그런 가운데 "막내는 스님이 되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집안에서 오갔다. 어렸을 적의 스님 역시 원효대사와 사명당에 관한 소설을 읽으며 불교에 호감을 품었다. 제주에서 전북 김제로 이사한 뒤 그곳에 있는 금산사와 자연스럽게 연결돼 열 일곱에 출가했다. 도법스님은 그래서 "주체적 의식 없이 분위기 때문에 그렇게 됐으니, 나는 그냥 인연 따라 중이 된 사람"이라고 말한다.

출가한 뒤에는 절 생활을 따라가기에 급급했다. 절에서는 세속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으라고 했고 스님은 그것을 지키기에 바빴다. 어머니도, 두 형도 만나지 않았고 편지도 주고 받지 않았다. 가족이 그리워 눈물 흘리고 슬퍼할 틈이 없었다. 출가한 지 2년쯤 지났을 때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들고 사람이 찾아왔지만 절의 분위기에 눌려 그냥 돌려보냈다. 얼마 뒤 가까이 지내는 스님이 그를 불러 "아무리 출가를 했다 하더라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데 어찌 그리 무심하냐"고 질책했고 그는 그 일을 계기로 삶과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을 품게 됐다.

불교와 인연을 맺은 지 20년 정도 지난 1990년에는 선우도량을 만들었다. 한국 불교의 모순을 고치고 대안을 찾자는 취지에서 만든 모임이었다. 그 본부를 전북 남원시 산내면 실상사에 두었다. 실상사는 지리산이라는 성산에 있고 통일신라 말에 불교적 대안을 찾으려는 운동을 했던 사찰이며 돈이 없고 불교세가 약한 지역에 있기 때문에 새로운 운동을 하기에 좋아 보였다.

실상사에 들어가 그는 불교적으로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운동, 사회적으로는 생명평화운동을 전개했다. 실상사를 생태자립의 공동체적 대안이 되도록 하고 주변 마을을 생태공동체로 만드는데 주력했다. 목사, 신부, 수녀 등 다른 종교인들과 환경운동가 등이 실상사를 오가며 힘을 보탰다. 그래서 실상사와 지리산 자락은 생태와 공동체 운동의 어머니와 같은 곳이 됐다.

● 약력

1949년 제주 출생

1966년 금산사 출가

1990년 선우도량 창립

1995년 실상사 주지

2010년 실상사 회주, 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

■ 도법스님과 수경스님의 관계는

도법스님을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수경스님이다. 둘은 나이가 같은데다 실상사에서 함께 공부하고 생명평화순례를 함께 떠나는 등 도반의 관계를 보였다. 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였던 수경스님은 지난해 6월 갑자기 화계사 주지 자리를 내놓고 조계종 승적을 반납하겠다는 글을 남긴 채 주변과 연락을 끊어버렸다.

도법스님은 수경스님이 속세에서 몸을 숨긴 뒤 한동안 폐사지를 순례하다가 지난 겨울 미얀마, 캄보디아, 태국, 베트남 등 동남아를 돌아본 뒤 최근 귀국했다고 전해주었다. 그 사이 건강도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수경스님이 갑자기 환경운동을 중단하고 잠적한 이유에 대해 도법스님은 "좌절감이 치솟았고 화가 났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생명 문제가 중요한 것은 틀림없는데 정부는 아무런 의식이 없고, 불교계도 적극적이지 않아서 좌절감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판단하고 또 다른 길을 찾아 나선 것이라고 도법스님은 설명한다.

도법스님은 "수경스님이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다"며 "그가 농촌에서 수행, 생산활동, 사회활동을 통합하는 공동체 같은 것에 관심이 많은 것 같으니 틱낫한 스님의 플럼빌리지 같은 공동체를 한번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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