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이 뚫린 양 치솟기만 하던 국제상품 가격이 대폭락했다. 원유는 물론 금, 은, 그리고 구리까지. 인플레이션 기대 바람을 타고 훨훨 타올랐던 상품시장엔 순식간에 찬 기운이 돌면서 일순간 패닉(공황)상태가 되어 버렸다. 거품붕괴 신호일지, 아니면 일시적 조정에 불과한 것인지 해석이 분분하다.
기록적 붕괴
5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6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선물가격은 8.6% 떨어지면서 배럴당 99.80달러에 마감했다. WTI 가격이 100달러 밑으로 떨어진 건 근 50일 만이며, 하루 하락폭으론 약 2년만에 최대치였다.
투기수요가 몰리며 수직상승을 거듭했던 귀금속 가격도 급전직하했다. 금 가격은 6월물이 전날보다 2.2% 떨어지면서 온스당 1,481.40달러. 3일부터 사흘 연속 하락세를 보였다.
은값의 폭락은 가히 기록적이다. 2일 5%대, 3일과 4일 7%대, 그리고 5일엔 8%대 등 갈수록 낙폭을 키워가고 있다. 인플레이션 국면에서 대표적 투기종목으로 꼽히는 은 가격은 1년 새 175% 폭등세를 보이며 한때 온스당 50달러를 넘보기까지 했으나, 최근 1주일 새 25% 이상 폭락하면서 36.23달러까지 추락했다. 이밖에 구리(3.3%) 플래티늄(2.6%) 팔라듐(4.8%) 등 산업용 상품 가격도 일제히 하락세를 보였다. 이에 따라 국제상품가격 지수인 로이터/제프리 CRB지수는 2년여 만에 가장 큰 낙폭(4.9%)을 기록했다.
폭락 이유
방아쇠를 당긴 것은 은이었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가 은 선물거래 증거금을 잇달아 올리면서 은에 대한 투자심리를 급격히 위축시킨 것. 은 가격 폭락은 국제상품시장에서 투기세력의 이탈을 촉발했고, 이것이 다른 상품에 대한 연쇄 매도로 이어졌다.
각종 경제 환경도 복합적으로 맞물렸다. 이날 나온 미국의 지난 주 신규실업수당 신청자 수는 전주보다 4만3,000명이나 늘어난 47만4,000명. 가뜩이나 1분기 미국 성장률(1.8%)이 시장 기대치(2.0%)를 밑도는 것으로 나온 상황에서 고용지표마저 부진한 것으로 나타나자 미국의 경기둔화, 나아가 더블 딥(이중 침체) 우려까지 제기됐고, 이는 상품시장을 급속 냉각시켰다.
여기에 유럽중앙은행(ECB)이 이달은 물론 다음 달에도 기준금리 인상은 없을 것임을 시사한 것이 달러화 강세로 이어지면서 상품가격 급락의 배경이 됐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 “더 이상의 금 투자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밝히고, ‘헤지펀드의 큰 손’ 조지 소로스가 “금을 팔았다”고 밝힌 것 역시 상품 가격 정점 인식을 부추겼다.
향후 전망은
물론 이번 폭락은 일시적 조정일 가능성이 크다. 투기세력이 차익 청산에 나서는 것일 뿐, 국제 상품시장의 수급 펀더멘털은 여전히 공급부족이라는 분석이 많다. 애틀랜틱캐피털 어드바이저스의 닉 젠틸 소장은 “단순한 조정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이 에너지시장에 변수를 주긴 했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없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대세 하락 징후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중국, 인도 등 신흥국들의 긴축 행보가 본격화하고 미국의 양적완화 조치가 중단이 되면 상품 수요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정영식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적어도 상품가격 급등세가 진정되는 변곡점으로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