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00년 문명국 저력으로… 中, 인류문명 새판 짠다"
세계는 더 이상 미국 천하가 아니다. 구소련 붕괴 이후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였던 세계는 지금 중국과 미국의 양강 구도로 급속히 재편되고 있다. 중국의 부상은 예상됐지만, 그런 변화가 이렇게 빨리 찾아오리라고 보는 이는 많지 않았다.
중국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무엇일까. 세계를 재패한 바 있는 서유럽이나 미국의 국가 정체성이 근대 국민국가 탄생 이후 형성됐다면, 중국은 5,0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문명국가의 정체성을 띠고 있다. 중국만의 차별성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영국의 정치학자 마틴 자크는 자신의 저서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 에서 "중국만의 차별성을 파악하려면 중국을 문명국가로 이해하는 중국인의 가치관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고려대 교수를 그만둔 지 25년 만에 모교를 찾은 도올 김용옥도 그렇게 판단했다. 지난달 28일 고려대 백주년기념삼성관 국제원격회의실에서 '중국의 세계질서 개편_중용의 화해정치론'을 주제로 강연한 그는 "문명국가의 정체성에 의해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며 중국 민족이 세계 제일이라는 중화사상이 끊임없이 고취되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중국이>
도올은 "중국의 힘은 문명에서 나온다"는 말로 운을 뗐다. 중국의 문명이 서양 보다 뒤떨어져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측면이 있으나 실제론 정반대라는 것이다. 도올은 "중국 문명은 고대 문명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번창했고, 찬란하고 경이로운 인간 중심의 문명을 확립한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는 중국의 베이징이었다. 당시 베이징(北京)의 인구는 60만 명. 파리(20만 명) 런던(5만 명) 등 서유럽의 대표 도시를 크게 능가했다. 1420년에 완공된 쯔진청(紫禁城)은 세계 최고 수준이 어떤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중국 문명은 이렇게 일찌감치 서구를 앞섰다. 중국은 19세기 아편전쟁에서 패하면서 서구 열강에 무릎을 꿇었으나, 적어도 그 이전까지 중국의 문명과 문화는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당나라 시대(7~10세기) 수도 시안(西安ㆍ당시 장안)은 세계에 문호를 개방한 국제도시 같은 곳이었다. 서쪽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이방인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한국과 일본에서도 시안을 찾았음은 물론이다. 당나라는 포용성이 뛰어났다.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세계의 여러 종교가 전파돼 꽃을 활짝 피우기도 했다. 당시 시안의 인구는 무려 100만 명이었고, 외국인 거주자만 5만 명이 넘었다.
서양 학자들은 중국 문명을 평가하는 데 인색하지만,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의 중국은 서유럽의 콧대를 꺾어놓고도 남을 정도였다. 특히 청나라 시대(17~20세기 초) 수도였던 베이징은 세계의 학문과 지식이 집합한 곳이었다고 도올은 평가했다. 도올은 이런 탄탄한 문명이 21세기 들어 중국의 '빅2'진입을 가능하게 한 밑바탕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21세기에 중국한테 주어진 과제는 무엇일까. 칠판을 한자로 도배해가면서 강연에 열중하던 그는 "앞으로 인류의 운명은 중국에 달려 있다"고 목청을 높였다. 중국이 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지가 관전 포인트라고 했다. "미국은 20세기에 위대한 문명을 정립했다. 도덕성이 바탕이 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기 자동차 전화 컴퓨터 등 문명의 이기가 모두 20세기에 만들어졌다. 미국이 없었다면 현대 문명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올은 이제 바통이 중국으로 넘어갔다고 했다. "급변하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중국의 역할은 분명하다. 미국이 만들었던 문명을 넘어서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내느냐가 관건이다. 미국 뉴욕의 맨해튼을 유대인들이 장악하면서 미국 문명, 나아가 세계 문명을 주도했던 것처럼 중국이 과연 새 문명의 패러다임을 창출할지 주시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이웃인 우리는 관전자 입장에 머물러야 할까. 도올은 "중국을 설득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중국이 추구할 신문명과 문화가 미국의 아류(亞流)가 안 되게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했다. 오랜 기간 세계를 지배했던 미국식 사상과 가치관에서 벗어나 인류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방향으로 문명의 새 역사를 쓰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강의가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주제는 자연스레 정치 쪽으로 옮겨갔다. 중국 정치에도 일가견이 있는 도올은 "중국에 의회민주주의가 없다고 비난하는 것은 난센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제도 없이도 성장을 거듭해 온 중국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중국의 리더십은 민주제도가 없는 한계를 극복하고 최소 10년 마다 정확히 바뀌어 왔다. 정치 수준이 그만큼 높다는 의미다. 중국의 정치 지도자들의 역량은 대단하지 않나. 리더들의 수준이 우리보다 훨씬 높다."
우리의 정치가 중국에 비해 하수라는 비판이었다. "우리는 피를 흘려가면서 민주주의를 일궜지 않나. 그로부터 나온 리더십이라는 게 지금 와서 돌아보면 형편없는 부분이 있다."
도올은 또 꼬일 대로 꼬인 남북문제의 실타래는 중국을 적극 활용하면 풀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남북문제는 미국을 통해 해결할 성격이 아니다. 우리가 중국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느냐에 따라 남북문제가 풀린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풀어야 한다. 중국에 도와달라고 손을 내미는 것을 주저해선 해결이 쉽지 않다."
■ 25년 만에 모교 고려대 찾아 변함 없는 직설화법
25년 만에 고려대를 찾은 도올 김용옥은 거침이 없었다. 독설의 직접화법에는 에누리가 없었다.
모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1982년부터 이 대학 교수로 있었던 그는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86년 4월8일 양심선언 후 학교를 돌연 떠났던 이유도 털어놓았다. 그는 "군사정권 때 억눌린 대학교육의 현실이 너무나도 암울해 교수를 그만뒀던 것"이라며 "민주화 이후 학교로 돌아올 생각도 했지만 일부 교수들이 반대한다는 얘기를 듣고 복직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이후 고려대 앞을 지날 때면 눈물이 났고, 그 동안 강연 요청도 많았지만 모두 거절했다"는 말도 했다. 도올이 복직하지 않은 사연을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그는 강연의 상당 부분을 미국과 함께 세계 양강을 구축한 중국 문명의 힘과 정치에 할애했으며 특유의 직설 화법으로 국내 정치를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도올은 "우리는 (정치적인 측면에서)중국에 지고 있는데, 이유 중 하나가 사람을 키우지 않는 풍토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치인들이 국가를 생각하는 치열함이 없다고도 했다.
그는 '유치인(有治人), 무치법(無治法)'이라는 한자 성어까지 동원해 인재 육성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법은 없다. 아무리 훌륭한 법이 있어도 법 자체가 세상을 다스리지는 못한다. 사람을 만들지 못하면 국가는 끝이다. 민족의 비전도 없다. 사람이 있어야 나라와 법이 돌아간다. 중국이 어떻게 인재들을 키우고 있는 지 우리 정부는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학생들을 향한 일침도 빼놓지 않았다. "인류 변화의 시기에 우리 젊은이들은 항상 깨인 상태에서 역사를 살아가야 한다. 자신만의 비전을 갖고 그것에 헌신해야 한다. 미국 일본 중국의 젊은이에게 뒤지지 않는 출중한 실력과 심오한 사유를 갖춰야 한다."
김진각 편집위원 kimj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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