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경기 수원시의 한 지하철역 앞.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 조직원을 검거하기 위해 출동한 서울 모 경찰서 소속 형사 3명이 잠복근무를 하고 있었다. 경찰은 몇 달 전 퀵서비스 업체에 "통장이나 카드 배달을 맡기는 경우가 있으면 신고해 달라"고 부탁해 놓았고, 이날 신고가 접수됐던 것이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 배달을 받기로 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A형사는 "분위기가 조금만 이상하면 아예 나타나지를 않는다. 이렇게 허탕을 치는 경우가 열에 아홉은 된다"며 "마약 조직보다 더 잡기 어려운 게 보이스피싱 조직"이라고 말했다.
보이스피싱 수법은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박모(48)씨는 지난달 25일 대검찰청 첨단범죄수사대 소속 검사라는 이로부터 "당신 계좌가 대포통장에 연루됐으니 검찰청 사이트에 들어가 절차를 밟아라"는 전화를 받았다. 박씨는 일러준 대로 사이트 정보분실센터에 개인정보와 보안카드 번호 등을 입력했다. 그의 계좌에서는 곧 950만원의 예금과 예금담보대출 5,000만원이 빠져나갔다. 전화한 검사는 물론, 검찰청 사이트까지 통째로 가짜였던 것이다.
서울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1월부터 4월까지 전화금융사기는 총 980건이 발생했고 피해액은 101억7,000만원에 달한다. 지난해 같은 기간 419건 41억1,000만원에 비해 2배가 훨씬 넘게 증가한 것이며, 2008년(554건ㆍ53억원)과 2009년(823건ㆍ85억원)과 비교하면 피해액은 급격히 커지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지난해 말부터는 범행 대상을 특정해 전화를 하는 수법이 등장했고, 올해 들어 범행 건수와 피해액 모두 급증하는 추세"라며 "특히 강남 등 상대적으로 부유한 지역을 집중적으로 노리고 있어 교수, 국회의원 등도 피해 대상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피해 지역 분석 결과 강남(52건), 송파(63건), 서초(45건) 등 강남 3구와 수서(60건) 지역 등에 범죄가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범죄가 늘어난 만큼 경찰의 검거 실적도 증가했다. 올해는 지난달까지 서울에서만 1,303명이 검거돼 이 중 57명이 구속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의 425명(6명 구속)보다 3배 이상 늘어났다.
하지만 일선 형사들은 "검거 실적은 늘어났지만 거의 심부름꾼들에 불과할 뿐, 핵심은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고 털어놓고 있다. 일반적으로 보이스피싱 조직은 중국을 근거로 한 '총책', 한국의 '현금인출책'과 환치기 등으로 중국에 돈을 전달하는 '송금책'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끼리의 연락은 철저히 중국 총책에 의해서만 이뤄지는 점조직 형태다.
돈이 전달되는 현장을 포착해 검거에 성공하더라도 그들에게서 중국 내 총책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일선 경찰의 하소연이다. 한 경찰관은 "함정 수사를 하려 해도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전화 목소리만 듣고도 금방 연락을 끊는다"며 "결국 일당을 한꺼번에 잡는 경우는 드물고 심부름꾼만 잡는 꼴인데, 그마저도 자신은 수고비만 받을 뿐 누구에게 지시를 받았는지 전혀 모른다고 하면 그걸로 끝"이라고 털어놨다.
이 때문에 경찰은 국제적인 공조 수사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서울 구로경찰서 수사팀 관계자는 "최근 대검찰청이 중국 공안부와 수사 공조를 통해 중국 내 보이스피싱 조직원을 검거한 것처럼 중국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에서 수백 명을 잡아봐야 주범들은 심부름꾼은 언제든 또 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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