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비추는 램프에 불이 켜졌다. 미술품 복원 전문가 김은진씨가 핀셋으로 그림에서 일어난 물감 껍데기를 떼내더니 자세히 살폈다. 숨까지 멈춘 채 핀셋 끝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범죄 현장에 선 감식반원 같았다. 그의 긴장감은 어느새 전염돼 옆에서 보는 기자도 침을 꼴깍 삼켰다. 책상 위에 놓인 작품은 고 윤재우(1917~2005) 화백의 ‘진양상’(1969). 하얀 반팔 블라우스에 연두색 체크무늬 치마를 입은 여성을 그린 작품이다. 그림 곳곳에는 검은 곰팡이가 피어났고 캔버스는 이리저리 뒤틀렸다. 마로 짠 천 끝자락도 헤졌다. 본디의 색 역시 자취를 감췄다.
숨쉬는 것 마저 조심스럽다
지난달 27일 국립현대미술관 지하 1층 작품보존미술은행관리팀 사무실. 수장 차병갑(58ㆍ한국화 및 지류 보존)씨와 임성진(39ㆍ재질 분석) 김은진(35ㆍ유화 담당) 박아인(32ㆍ조각 및 설치 담당)씨가 1년에 100여점의 미술품에 새 옷을 입히는 곳이다. 거장의 작품에 침 한 방울 튈까 말도 하지 않고, 숨쉬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미술품 복원의 첫 관문은 재질 분석이다. 어떤 연필로 그렸는지, 어떤 물감과 오일을 사용했는지, 단색을 썼는지, 색을 섞어 썼는지 알아낸다. 이 과정에서 전자ㆍ영상현미경, 형광X선 분석기, 유기물분석기(FT_IR) 등 최첨단 장비가 총동원된다. 치자꽃잎이나 등화 등 희귀 재료를 분석할 때는 수 개월이 걸리기도 한다. 이밖에 제작 연도, 나라, 시대, 작가별 특징을 잡아낸다. 최근에는 고 오지호(1905~82) 작 ‘풍경’의 재질 분석 과정에서 숨어 있는 한 여성의 나체 드로잉을 찾아내기도 했다. 임씨는 “작가가 밑그림을 그린 후에 캔버스에 다른 유화를 그렸던 것”라고 설명했다
재료 분석이 끝나면 다음은 본격 복원 작업이다. 이날 사석원 작가의 ‘푸른 그물 안의 쏘가리’(1992) 작품을 매만지고 있던 차씨는 “틀에 끼워져 있던 작품인데 검은 곰팡이와 황색 반점이 발견됐고, 접은 자국 탓에 구겨지고 구멍이 뚫렸다”며 “일단 삭은 배접지를 떼내고 비단으로 덧대 응급 처치를 했다”고 말했다. 배접지는 그림을 고정하기 위해 뒷면에 덧대는 속지와 같은 것이다. 배접지 제거는 증류수를 살짝 묻혀 손으로 문질러 돌돌 말아 없애는 세심한 작업이다. 차씨는 “마치 속옷을 갈아 입은 듯 상쾌할 것”이라고 웃었다.
이튿날 다시 들렀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여전히 같은 그림이 작업대에 올려져 있고, 달라진 것도 거의 없다. 포항시립미술관이 보존 처리를 부탁한 리히텐슈타인의 ‘침실’이 새로 온 것이 다다. 실리콘으로 액자에 부착해 종이의 우글거림이 심해진 것. 그림은 당장 만져 달라고 야단이지만 일단 내버려 둔다. 쾌적한 환경에서 종이도, 물감도 제 모습을 찾기 때문이다. 차씨는 “가장 집중력이 높을 때 해야 하기 때문에 그때를 기다리는 것도 있다”고 했다.
보는 이에겐 지루한 광경. 조각은 좀 다를까 하는 기대에 조각보존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최근 복원하는 작품은 한길홍 작가의 ‘윤회’ 시리즈. 점토로 만들어진 둥근 공 모양의 조각품이 거치대에서 뚝 떨어져 깨져 버렸다. 손톱만한 파편을 죄다 퍼즐 조각처럼 짜맞춘다. 이 작업이 일주일째란다. 조각도 시간과 공이 들기는 매한가지. 파편을 모은 뒤에는 원형과 같은 재질을 사용해 틈을 메운다. 박씨는 “그나마 동일 재질을 찾아내면 다행이지만 최근에는 신소재가 많이 나와 찾는 게 쉽진 않다”고 토로했다.
작품 복원 사흘째. ‘진양상’이 조금 달라졌다. 뽀얀 먼지가 걷히고, 물감이 벗겨진 부분은 호분으로 메웠다. 이제 같은 물감을 써 색 맞춤을 하면 일단락된다. 보통 회화 복원 작업은 상태 조사→표면 크리닝→떨어진 부분 메움→색 맞춤→도포→액자 제작 순으로 이뤄진다. 김씨는 “지난해 문우식 작가의 제목 미상 작품이 걸레처럼 찢기고 망가져 있었다”며 “습기에 축축 늘어지는 작품을 수십 개의 특수 테이프로 고정하는 게 거의 고행 수준의 인내심을 요구했다”고 했다.
국내 미술 복원은 아직 걸음마 수준
국내 미술 복원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07년부터 최첨단 장비를 들여 본격 미술 복원에 힘쓰기 시작했다. 이외에 삼성리움미술관 등에 미술복원팀이 따로 있긴 하지만 손에 꼽힐 정도다. 미술 애호가들이 늘어나면서 관심이 커졌지만 여전히 수준 높은 인력이 부족하다. 국내에서 미술품 복원을 가르치는 곳은 5, 6곳. 이마저도 문화재 복원을 중심으로 하고 부수적으로 미술품 복원을 다룬다. 국립현대미술관 팀도 대부분 문화재 보존처리과를 졸업한 후 영국 일본 등으로 유학을 다녀왔다. 25년째 미술관에서 복원 작업을 하고 있는 차씨는 어렸을 때부터 인사동 표구사 등에서 표구 일을 하며 미술품 복원을 터득했다. 20여년을 주기로 같은 작품을 두 번 이상 복원하기도 했다.
복원할수록 가격이 뛸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원형 그대로를 좋아하는 이들도 많아 복원했다고 다 가격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며 “하지만 의사가 환자를 가리지 않듯 훼손된 미술 작품을 가격으로 평가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이어 복원가의 자질에 대해 “꼼꼼하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그림에 대한 예의와 양심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들은 조용한 일을 마치고는 다같이 모여 레프팅을 하는 등 활동적인 생활을 즐긴다고 했다.
과천=강지원기자 stylo@hk.co.kr
■ 가정에서의 미술품 보존관리법
국립현대미술관 작품보존미술은행관리팀은 미술품을 가정에서 보관할 때도 그냥 방치하지 말고 식물을 키우듯 끊임없이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림을 걸어 두거나 보관하는 장소의 온도는 20도 안팎이 적당하다. 습도는 55% 정도가 좋다. 습한 곳에 작품을 두면 곰팡이가 피기 쉽고 종이가 습기를 머금어 쭈글쭈글해진다. 그러나 곰팡이가 피거나 쭈글쭈글해졌다고 바로 햇빛에 내놓거나 강한 바람을 맞게 하는 것은 금물이다. 수분이 갑자기 마르게 되면 캔버스가 수축해 물감이 뜨고 균열이 생길 수 있기 때문.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서 말린 뒤 복원 전문가에게 맡겨 수선하는 게 좋다. 습한 여름철이 지나면 부드러운 솔이나 붓으로 표면을 닦아 준 뒤 그늘에 내놓고 통풍을 시킨다.
조각 작품은 쉽게 변하지는 않지만 야외에 늘 두어서는 안 된다. 비와 눈에 포함된 산성 물질이 대리석 등을 산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작품도 직사광선에 노출되면 녹거나 틀어질 수 있으니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청동 작품은 수세미나 솔로 청소하면 자국이 남아 더 지저분해지기 때문에 마른 걸레나 부드러운 천으로 닦는 게 좋다.
또 작품을 걸거나 표구할 때도 주의해야 한다. 한국화나 서예 작품은 전통 한지를 써서 배접을 하고 틀을 만들 때도 같은 종류의 종이를 써야 한다. 또 닥종이는 습도와 온도에 따라 종이가 수축하거나 팽창할 수 있어 적절한 여백을 두고 표구하는 것이 좋다.
강지원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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