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이지아 이혼소송'이 알려진 지난달 21일 저녁. 퇴근을 기다리던 녀석이 대뜸 질문을 했다. "아빠, 서태지 사건은 에리카 킴 사건을 덮으려고 정부에서 터뜨린 게 맞지요?"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지한 표정이 그게 아니었다. "누가 그래, 어디서 들었어?" 이번엔 녀석이 의아해했다. "기자인데도 모르세요? 다들 알고 있는데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 한복판에서 3년째 착실하게 직장을 다니는 딸아이였다.
다음 날 사무실에 나와보니 그러한 소문들을 '무지한 우리 아이'만 믿었던 게 아니었다. '정부가 덮으려고 터뜨렸다'는 소문이야 뉴스가 될 수 없지만,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그 소문을 믿고 있다'는 사실은 정확한 뉴스가 되어 있었다. 주말을 지나 이어 4ㆍ27 재보선이 있었다.
선거 당일 정치권의 가장 큰 관심은 투표율이었고, 다른 때보다 젊은 층의 투표율이 높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개표도 하기 전에 야권은 기가 살았고 여권은 풀이 죽었다. 이러한 일이 선거와 투표로 유지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상식적으로 타당한 상황일까. 옛날부터 그래왔다고, 그래서 당연하다고 넘어가기 어렵다. 강원도와 분당이라는 경제수준과 의식구조가 비교적 상이한 지역에서 공통된 현상이 일어났다.
불신으로 '왕따' 자초하는 여권
여권이, 현 정부가, 청와대가 젊은 층으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번 투표의 결과를 보면 '누가 좋아서 찍었다'보다 '누가 싫어서 투표장에 갔다'는 유권자들이 대세를 좌우한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민주당이 좋아서, 손학규가 좋아서, 최문순이 좋아서" 찍은 사람보다 "한나라당이 싫어서, 강재섭이 싫어서, 엄기영이 싫어서" 투표장으로 달려간 유권자가 더 많았지 않았나 싶다. 사전 여론조사 내용이 결과와 다르게 나왔다고 이변이라 할 수 없다. "누구를 찍을 것인가"라고 묻지 말고 "어느 편이 더 싫은가"라는 설문을 제시했다면 분명 투표결과에 근접한 조사가 나왔을 터이다.
분당이나 강원도는 보수층이 많이 모여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다. 특히 분당은 스스로 '합리적 보수'라는 인식을 가진 중산층 젊은 세대가 많은 곳이다. 굳이 합리적 보수의 의미를 찾는다면 자신들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보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을 중요한 덕목으로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는 옳고 그름의 기준에서 독선과 고집을 갖고 있는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수구나 더 이상의 호칭으로 불리며 보수층 내부에서부터 따돌림을 자초하는 셈이다.
분당이나 강원도나 대략 50% 정도의 투표율에 4% 정도의 득표차가 났다. 투표하지 않은 50%는 대개 '누가 되든 알 바 아니다'는 생각이니 정치적 의미를 무시해도 되겠다. 나머지 절반이 51 대 47의 결과를 낳았는데, 이를 두고 갑자기 보수층에 변화가 생겼다고 보는 것은 이긴 쪽이나 진 쪽이나 똑같이 어리석다. 오히려 보수층은 더욱 견고해졌으며, 옳고 그름을 따지는 합리적 젊은 세대가 팽창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아파트 가격이 떨어져서, 세금이 줄지 않아서 야당을 찍었다는 인식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다.
'옳고-그름'에 더 민감한 보수층
이번에 투표하지 않은 50%의 유권자 가운데는 '싫어진 사람'이나 '정권을 맡겨선 안 되겠다는 후보'가 등장하면 그를 떨어뜨리기 위해 상당수가 투표장으로 달려나갈 게 분명하다. 내년 총선도 그렇고 대선도 마찬가지다. 국민이 좋아하는 후보, 그것도 만사 제치고 투표장으로 뛰어가 찍어주고 싶을 만한 지도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질 수는 없지 않은가.
좋아하는 후보에게 몰려가고, 진정 축제와 같은 선거가 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게 이번 선거의 아쉬움이었다. 여권은 왜 자신들이 '합리적 보수'를 자임하는 층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지 살펴야 한다. 야당은 왜 자신들을 좋아하는 유권자보다 상대방을 싫어하는 유권자의 덕을 보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정병진 수석논설위원 bjju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