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서울 종로2가 초입의 종각이 서 있는 자리, 그러니까 바로 화신백화점 맞은 편에 자리잡은 6층 건물 한청빌딩에 8ㆍ15해방 직후 좌익 문학인들의 본거지 ‘문학동맹’이 있었다. 당시 문학평론가 임화를 중심으로 소설가 김남천 이태준 등이 그 곳에서 노상 죽치고 있었다고 한다.
한데 이건 또 무슨 인연인가. 1940년대 말에 그이들이 죄다 월북한 뒤 1950년대 초 그 빌딩에 장준하가 하던 ‘사상계’ 잡지사가 세 들게 되고 본시 헛간이었던 그 빌딩의 맨 꼭대기에 꾸렸던 사무실 하나에도 오영진 박남수 원응서 등 서북 문학인들이 주관하던 ‘문학예술’ 잡지사가 들어 서게 됐다.
그렇게 한청빌딩은, 또 어쩌다가 파란만장했던 4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에 걸쳤던 이 나라 문화마당의 한 가운데에 휘말려 들게 되어 있었던지, 이것도 그 무슨 운명의 희롱이나 아니었던지 싶어진다.
더구나 40년대 말에 월북했던 그이들은 줄줄이 북에서 처형을 당하였고, 장준하도 50년대, 60년대의 이 남쪽 사회에서 형무소를 들랑날랑 하다가 70년대 중엽에 이르러 이상한 임종을 맞는다. 그 자리가 지금은 바로 저렇게 종각 자리가 되어 있다.
그 무렵 임화 등이 한청빌딩에 터를 잡고 있을 때 손소희와 전숙희는 1948년부터 명동 초입에서 다방 ‘마돈나’를 경영하고 있었다. 30대 초반의 두 미인이 하는 다방에 마돈나라는 이름이 썩 어울려 보였는데, 그 다방에 몇몇 문학인이 단골로 드나들었다. 시인 정지용에 김영랑, 뒤에는 월북했던 이용악 등이 줄곧 죽치고 있었고, 자그마한 중견 소설가 김동리도 그 단골 중 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동리와 손소희가 운명적으로 이 곳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 간 뒤 뉴욕에서 수필가로 활동하며 현지의 한인문인협회 회장도 맡게 되는 이계향이라는 미인은, 그 무렵 1948년에는 충무동 쪽에서 다방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 쪽으로는 당시의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이 주로 드나들어 그이도 끝내는 당시의 한국민주당 거물이던 모모씨와 결혼, 한 때는 가회동의 대저택에서 자유당 민국당 등 정계 거물들의 ‘살롱 여왕’ 노릇을 하며 이 나라 초창기의 정치를 주름 잡기도 했다.
아무튼 동리와 손소희는 그렇게 마돈나 다방에서 처음 만나 서로 사귀게 됐는데, 뒤에 동리에게서 직접 들은 얘기로 그 때 손소희는 소설을 쓴다고는 했지만 도무지 읽어낸 것부터가 너무 빈약하더란다. 그리하여 자신이 그 다방 안에서 마주앉아 소설 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시켰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고전들을 먼저 읽어 보도록 권했는데 일본 신조사(新潮社) 간행의 세계문학전집 37권부터 읽도록 했다는 것이다.
손소희는 본시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 뒤 일본으로 혼자 건너가 대학에 잠깐 다녔다고는 하였지만, 어릴 때 이야기 같은 것은 본인이 한번도 발설하지 않아 우리 문단 성원 중 누구 하나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 그 점에 한해서는 끝까지 완강하게 입을 다물었다.
다만 왜정 말기에는 어찌어찌 현 중국 동북 창춘(長春)에서 옛 만주국 치하의 신문사로 들어가 염상섭 안수길 윤금숙(뒤에 소설가 김송의 부인) 등과 같이 잠깐 기자로 지내기도 한다. 러시아혁명을 피해 흘러흘러 남하해온 러시아 귀족들의 마지막 기착지인 하얼빈과 가까운 그 곳에 어쩌다가 젊은 손소희가 흘러 들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함경북도 경성에서 그곳 만주 땅은 두만강 건너 지척이었으니까 그럴법해 보이기는 한다.
그렇다면 일본 대학은 또 뭔가. 어느새 일본 땅으로 갔다가 다시 바다를 훌쩍 건너뛰어 만주 땅으로 흘러 갔다는 말인가.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되는 그 때의 교통편을 생각하더라도 이미 이때부터 젊은 손소희의 포부와 배짱이 웬만한 남자 이상으로 만만치 않았으리라는 것이 짐작 된다.
그 시절, 이 땅의 태반의 여인네들과 비교해 보더라도 격세지감으로 발자취가 크고 이미 그 속에 그 뒤의 나름대로의 파란을 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돌아 돌아 돌다가 8ㆍ15해방 뒤에 서울 명동 초입에서 전숙희와 같이 마돈나 다방을 차려 그 당시 우리 문학인들의 심심파적 쉼터를 경영하다가 동리와 만나게 되고 6ㆍ25전쟁이라는 회오리에 휘감기며 두 사람은 전격적으로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다.
익히 아시다시피 그 무렵 동리는 좌우 문학 대결에서 우익 대표로서 맹활약을 하며 논진을 펴고 있었다. 이것도 70년대 어느 날인가, 동리에게서 내가 직접 들었던 이야기인데, 그 무렵 한 번은 선배 소설가 이태준으로부터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좀 만나자는 기별을 받고 한청빌딩 쪽으로 찾아 갔었는데, 뻔할 뻔 자, 자신을 저들 편으로 포섭하려던 것이었다고 한다. 그이가 그 곳 돌아가던 분위기에서 받았던 첫 느낌도 이건 아니다, 제대로 문학을 하려는 동네는 아니다, 결코 자기가 근접할 동네는 아니라는 강한 거부감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6ㆍ25전쟁으로 별안간 북한군이 서占?진주하면서 동리는‘반동의 괴수’로 변해버렸다. 오갈 데가 없어진 동리를 구해준 이가 손소희였다. 손소희는 자기 집의 안방 천장 위에 동리를 석달 동안 숨겨 준 것이다.
1940년대에서 50년대, 60년대, 70년대의 우리 문단을 좌지우지했던 동리의 문단사적 큰 자취를 보자면 이 손소희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나 자신부터가 이 무렵의 일을 살아 생전의 동리에게서 몇 마디 들어보기는 했지만, 그 때 이야기를 덤덤하게 하는 동리도 그 이상 싱거워 보일 수가 없었고 그냥 덤덤하게 들어 넘기던 나도 싱겁기 짝이 없었다. 세상 만사 지내놓고 보면 매사가 그런 것이기는 할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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