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어느 대학에서 선배들이 또 후배들을 때렸다고 한다. 형법상으로는 그저 '폭행'이나 '구타' 따위에 불과할 그 가당찮은 일을 흔히 '얼차려'라고 부르나 본데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혹시 '얼+차려'인가. '얼'은 혼(魂)을 뜻하는 접두사인 것이고 '차려'가 차려 열중쉬어의 그 '차려'인 것이라면, '얼차려'는 '얼 열중쉬어'의 반대말쯤 되는 것일까. 그러나 그 일의 결과로 보자면 그건 얼을 차리는 일이라기보다는, 얼빠진 이들이 멀쩡한 다른 이들의 얼까지 빠지게 하는 일이 아닌가.
소위 문단(文壇)에서 우리 또래들에게도 이제는 후배들이 많이 생겨서 그 후배들을 어떻게 대하는 게 옳은가 하는 얘기를 가끔 나눈다. 결론은 늘 '꼰대'가 되지는 말자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인데 그것은 선배라는 의식 자체를 버려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이가 어려도 글이 더 깊으면 그가 곧 선배라고 생각하는 게 옳다. 이런 기특한 생각을 나 혼자 하게 되었을 리가 없다. 올 초에 출간된 천양희 선생의 시집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에서 '방편'이라는 제목의 시를 읽고 한 생각이다. 나는>
시인은 이렇게 말문을 연다. "책을 읽다가 무릎을 친다/ 밑줄 치는 대신 무릎을 친다/ 가령 뼈아픈 문장들." 그리고 자신이 읽은 그 '뼈아픈 문장'들을 몇 개 옮겨 적는데 그 중 하나가 이렇다. "사랑이란 함께 웃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우스워지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런 감상을 덧붙인다. "나에게도 사랑이 있었나/ 아연하고 실색하네/ 나는 이미/ 무릎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니네/ 나를 치고 있는 것이네." 그리고 시는 이렇게 끝난다. "무릎은 내가 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네."
방편(方便)이라는 말은 '접근하다' 혹은 '도달하다'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우파야(upaya)'를 번역한 말이라고 한다. 그때그때 간편하게 택하는 수단이라는 뜻으로 널리 사용되는 말이지만 사실은 불교 용어인데 열 개의 수행법(바라밀) 중 하나다.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중생 개개인의 특성에 맞게 채택하는 기술을 뜻한다. 나에게는 나에게 걸맞은 방편이, 당신에게는 당신에게 적합한 방편이 있다는 얘기다. 인용한 시에서 시인은 '책을 읽으며 무릎을 치는 일'이 자신의 방편이라고,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말한다.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시인이 '뼈아픈 문장'의 한 사례로 옮겨 적은 저 문장이 바로 젊은 작가 김애란 씨의 단편소설 <달려라, 아비> (2004)에서 인용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소설에서 다시 정확히 옮기면 이렇다. "그때 나는, 사랑이란 어쩌면 함께 웃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우스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천양희 선생은 1942년생이고 김애란 씨는 1980년생이다. 칠순에 이른 인생의 대선배가 까마득한 후배가 25세에 쓴 문장을 읽고 무릎을 쳤다고, 덕분에 깨달음을 조금은 얻었다고 말한다. 달려라,>
나는 이 대목에서 감히 천양희 선생의 인품 한 자락을 엿본 것만 같아서 마음이 참 좋아졌더랬다. 까마득한 후배에게서도 배울 것은 배우겠다는 그 태도는 웬만큼 넓게 열려 있는 마음이 아니라면 갖추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리라. 게다가 몰래 배워 얻었으면 그만인 것을, 이렇게 시로까지 써서, 후배 작가에게 진 빚을 세상에 알리고 감사를 표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렇게도 소탈한 선배도 있기는 한 것이다. 이런 선배가 되어야만 하겠다고 나는 시집의 한 귀퉁이를 접어두었다. 이렇게 얼을 차려 보는 것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