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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화 감독의 액션영화에 바친 60년] <10> '콘티뉴어티' 가 있는 연출을 지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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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화 감독의 액션영화에 바친 60년] <10> '콘티뉴어티' 가 있는 연출을 지향하다

입력
2011.05.01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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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과 창의성은 내게 하나의 '화두'였다. 감독은 늘 관객보다 앞서 가야 하고 창조적으로 새로움을 모색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난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게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자부하다 보니 어설픈 자기 자랑만 늘어 놓은 게 아닌가 조심스럽다. 그러나 객관적인 평가는 어차피 내 몫이 아니고 자평이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내가 알고 하늘이 알면 그 뿐이니 어쩔 수 없다고 자위해 본다.

어차피 말 나온 김에 내 자부심 하나 더 보태보련다. '청출어람' 운운하며 내 제자들을 병풍 삼아 역시 내 얼굴을 세우기도 했는데 내 밑에서 연출 공부한 감독들은 감히 행운아였다고 단언한다. 난 쉽게 넘어가는 스타일이 아니므로 내 밑에서 연출을 공부 한다는 것이 대충대충 시간 때우기로는 불가능했고, 일단 본인이 성실하다면 난 끝까지 신임하고 밀어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난 어설프게 감독 흉내 내는 아마추어리즘은 딱 질색이었고, 성격상 프로페셔널하고 강직하며 성실한 연출을 지향했으므로 조금이라도 눈썰미 있고 조금이라도 배우려는 의지가 있는 조감독이라면 뭔가는 얻어 가기 마련이었다.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임권택 감독은 내가 자신을 신임하여 OK여부에 대한 확인을 맡기다 보니 정신 바짝 차리고 매 장면을 집중해서 살펴야 했고, 그것은 연기와 장면을 면밀하고 세심히 보는 연출수업에 대단한 도움이 되었으며 훗날 자신의 연출에 영향을 주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난 그 인터뷰를 보고 상당히 당황했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감독의 신임이 어느 정도인가를 묘사하기 위해 약간의 가감이 있을 수는 있으나, 사실이 왜곡되는 수준이라면 더구나 그것이 모시고 있던 감독에게 피해가 가는 왜곡이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내 연출 스타일 상(꼭 임 감독한테 뿐만 아니라) 모든 조감독에게 정신 차리고 장면에 집중해서 관찰하라는 의미에서 간혹 OK여부를 확인하곤 한다. 그런데 임 감독은 내가 자신을 얼마나 신임하는지 증명하는 장면으로 매번 모든 OK 여부를 본인에게 확인했고, 심지어 배우들도 감독인 내가 아니라 자신의 OK신호를 확인했다는 것이니,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임 감독을 데리고 있던 그 시절 그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어린 청년이었고, 영화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 없는 성실한 풋내기에 불과했거늘, 어찌 내가 그에게 모든 OK신호를 일임했겠는가. 내 신임을 확인하는 발언치고는 심히 과해서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난 간혹 '정신 바짝 차리고 장면을 집중해서 보라'는 일종의 '평가'와 '격려'의 의미를 내포하며 OK여부를 묻기도 했지만, 사실 정창화 식 연출수업의 키워드는 '콘티뉴어티'라고 생각하다. 콘티뉴어티(continuity)는 영화계에서 흔히 '콘티'라고 줄여 말하는 일종의 장면연결을 위한 스케치다. 내가 알기론 최근까지 한국영화계에서 제대로 된 콘티로 영화를 찍은 감독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역시 내 밑에서 연출수업을 하다가 '내 청춘 황혼에 지다'(1967년)로 데뷔했던 전우열 감독이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정창화 감독님의 콘티는 정확하고 그림의 완성도가 높아 콘티만 봐도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고 인터뷰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는 내 콘티만 보면 "아무리 머리가 나쁜 사람도 감독 할 수 있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라고 하며 높이 평가하는 최근 한국영화제작 여건에서조차도 단지 소수의 감독만 콘티를 사전에 완성해 놓고 촬영에 들어간다고 한다. 아직도 콘티를 통한 치밀한 사전계획이 실현되고 있지 못하다면 한국영화 제작 여건의 향상은 여전히 요원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대부분의 감독들이 여전히 콘티를 미리 만들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대본에다가 줄을 그어 카메라 사이즈를 표시하는 약식 콘티를 사용해오고 있는 것이 한국영화계의 현실이지만, 나 같은 경우는 처음부터 콘티를 작성했었고, 친절하게도(!) 촬영 전에 스텝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사전 준비 작업에 만전을 기하도록 했다. 콘티에는 장면의 연속성(continuity) 뿐 아니라 편집, 소품, 조명, 분위기, 음악, 카메라 워킹, 앵글이 표시되어있기 때문에 이 콘티 북을 미리 받아 본 스텝들은 다음 장면을 충분히 이해한 후 철저하게 준비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일의 진행속도가 빨라지고,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감독의 입장에서는 연출수업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며 그렇기 때문에 빨리 감독이 될 기반이 되기도 했다.

콘티 없이 촬영하는 대부분의 경우, 장면의 연속성은 오로지 감독의 머릿속에만 있다 보니, 조감독도 다른 스텝들도 매일 아침 그날의 촬영 분을 지시 받고 수동적으로 임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갑자기 예상치 않은 사건(비가 온다거나, 배우가 촬영을 할 수 없게 된다거나 등)이 생기면 상황수습도 감독 혼자의 몫이 되다 보니 나머지 스텝들은 늘 어리둥절한 상태로 촬영을 진행 할 수밖에 없다. 나 또한 그러한 아픔이 있었다. 최인규 감독님한테 처음 연출 수업을 받을 당시 역시 주어진 콘티가 없었다.

최 감독님은 영화작가이면서 뛰어난 테크니션이고 엔지니어의 면모도 겸비한 탁월한 영화인이셨기 때문에 내가 조감독을 할 당시 주한미국문화원에서 협조 받은 미첼 카메라의 완벽한 사용법 습득은 물론, 시간만 나면 카메라를 분해하고 조립하며 연구해야 했다. 또한 그날 촬영 분은 그날 바로 편집을 해야 했기 때문에 당연히 영사기 사용법도 기본이었다. 최 감독님에게 조감독은 영화에 대해 종합적으로 다 알아야 한다는 원칙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콘티를 스태프와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감독이 뭘 해야 할지 몰랐고, 그날그날 촬영 때마다 필요한 사항은 그 분이 얘기하는 대로 허수아비처럼 준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날 촬영이 끝나면 촬영내용을 전부 머릿속에 담고 있다가 집에 가서 복기하며 한 커트 한 커트 메모하면서 내 나름대로 그림을 그려서, 스크랩 해 놓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한 작품이 끝난 뒤 전체 콘티뉴어티가 완성 되어 있었고 그것을 보면서 영화공부를 할 수 있었다.

영화박물관 등에서 내 작품의 콘티를 요청한 적이 있었지만, 홍콩과 미국 등지로 이사를 다니다 보니 개인적으로 보관해 놓은 것이 없어 아쉽게도 아무것도 내 놓을 수 가 없었다. 여러 조감독들이 가지고 있는 흩어진 콘티를 찾아 퍼즐처럼 맞추는 작업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핑계를 대자면 내 개인적인 사유 외에도 콘티와 스틸, 심지어 영화 네가 원판까지 잃어버리고 찾지 못하던 당시 한국영화계의 영세성에도 원인이 있다.

'장화홍련전' 같은 경우도 원판이 대만과 홍콩으로 수출되면서 행방불명이 돼 버렸다. 내 영화 대부분이 해외 수출되면서 원판이 분실된 건 못내 아쉽다. 하기야 당시 수출된 한국영화들 대부분이 그런 운명이었다. 프린트 비용이 없어 원판까지 수출해버리는 무지하고 영세한 영화계였으니 말이다. 무지하다고만 탓하기엔 제작여건이 너무나 열악했다.

제작 진행비도 없이 촬영에 들어가는 일이 비일비재였다. '장화홍련전' 다음 작품인 '풍운의 궁전'(1957)을 촬영할 때 호떡으로 끼니를 때우며 촬영장을 지키기도 했다. 실은 그 작품을 하고 싶지 않았다. 작품도 마땅치 않았고 그 무렵엔 함께 일할만한 이렇다 할 배우들도 없을 때였으니까. 그런데 그런 작품이라도 수락하지 않으면 연출할 길이 없어 선택의 여지없이 촬영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제작 여건은 참으로 영세해서 대부분의 제작자는 제작비 3분의 1 정도를 들고 와서 촬영을 시작 했다. 그리고 나서야 지방흥행업자들이 감독이나 배우, 영화의 진행 과정을 보고 뒷돈을 대줬다. 그 무렵만 해도 '장화홍련전'을 막 끝내고 내가 그렇게 두드러지게 유명할 때도 아니니 지방에서 자금 투자가 순조롭게 이뤄지지 못했다. 식사비를 지불 할 수 없어 내 주머니를 털어 호떡을 사다가 전 스태프와 배우들이 나눠먹곤 했다. 그래도 그 시대에는 영화를 한다는 열정이 있었기에 배우도 스태프도 '눈물 젖은 호떡'을 먹으면서도 열심히 해 주었다. 요새라면 영화 제작 진행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 때는 모두가 가난했던 암울한 시대였고 버틸 수 있는 힘은 열정뿐이었다.

그 열악한 상황 속에서 영화를 만드는 입장이다 보니 나름대로 여러 궁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 시장에, 한국 제작 여건에 맞는 것을 만들고, 템포를 빠르게 하자.' 나는 암울한 시대의 관객들에게 뭔가 활력을 주고 싶었고 일본영화의 영향을 받은 소시민 영화, 소위 대사 위주의 멜로드라마 보다는 스펙터클하고 빠른 템포의 미국영화를 모델로 삼고 싶었다. '그래, 템포다. 템포를 빠르게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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