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0일 새벽 1시40분께 서울 성북구 동선동 으슥한 골목. 중년 남자가 한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벽에 짓찧으며 구둣발로 밟고 있었다. 옆에서는 팔짱을 낀 초로의 여자가 "건방진 X"라고 거들었다. 행인의 신고로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남성은 도망가고 없었다. 여자는 피범벅이 된 채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2일 이 사건을 수사한 서울 성북경찰서에 따르면 세 사람은 그 몇 시간 전만 해도 서로 술잔을 기울이며 즐겁게 어울린 사이였다. 피해자는 폭행을 방관한 여자 김모(60)씨를 20년 넘게 "엄마"라고, 가해 남자는 김씨를 "누나"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들의 폭행은 친한 이들끼리 음주 뒤 일어난 단순 사건이 아니었다. '엄마'와 '누나' 라 호칭할 정도인 세 사람의 관계는 돈, 그리고 범죄 앞에서만 유효했다.
피해자 이희영(45ㆍ가명)씨는 소매치기 경력 28년의 특수절도 전과 12범. 그 세계에서는 알아주는 '기계'(기술자)였다. 누구는 중독이라고 하고 더러는 일종의 정신병이라고 하는 소매치기를 끊은 지 이제 1년 6개월이 됐다. 그러나 '엄마' 김씨는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 날 사건은 "홍콩 원정대가 꾸려졌다. 딱 한번만 더 (소매치기를) 하자"는 김씨의 집요한 권유를 이씨가 뿌리치면서 벌어졌다. 병원에 누운 이씨는 자신의 "박복"과 지난날의 과오를 탓했다. 그리고 "제발 이제는 수렁에서 헤어나고 싶다"고 절규했다.
이씨는 열여섯 나이에 처음 남의 주머니에 손을 댔다. 가난으로 학교 근처는 가보지도 못했고, 부모들이 잇달아 세상을 떠난 뒤 배가 고파 도둑질을 했다. "택할 수 있는 길은 술집 작부 아니면 도둑, 두 가지뿐이었어요. 나쁜 짓이라고 일러주는 어른도 없으니 멈출 수 없었죠."
바늘도둑은 소도둑이 됐다. 동네 문방구의 자잘한 학용품을 훔치다가 아이들의 주머니까지 털었다. 차츰 '영역'을 넓힌 그는 1990년대 중반에는 동료들과 일본 원정을 떠나 열흘 만에 2억원을 벌기도 했다. "배가 안 고플 때까지만 하려고 했는데, 소매치기해서 번 돈이 전셋집이 되니, 결국 집 사겠다는 욕심까지 나더라"고 했다.
경찰서와 구치소를 들락거린 건 필연이었다. 16세 때인 1982년 첫 수감된 후 악명 높은 일본 구치소에서 형을 살기도 했다. 그러다 2009년 다시 구치소에 들어가면서 삶에 회의가 들었다. "남은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동생들 뒷바라지하고도 범죄자라는 이유로 외면당했고, 친구들도 떠나갔고요."
여동생이 언니 덕에 고교를 졸업하고 시집가는 동안 그는 이름 석자 겨우 쓸 수 있을 뿐 까막눈으로 살았다. 번 돈은 은퇴한 선배 소매치기들에게 정기적으로 상납했다. 남은 돈도 변호사 비용 대기 바빴다. 무엇보다 늘 가슴 졸여야 하고, 거짓말로 포장하는 삶이 지겨웠다.
출소 4개월 전 그는 할 수 있는 게 소매치기밖에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 나머지 제 손으로 목을 찔렀다. "감옥 안을 자유롭게 누비는 날짐승들과 고양이를 보니 나는 그들보다 못한 거예요. 또 여기 오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생명은 질겼고, 그는 새로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2009년 10월 출소 후 지인의 도움으로 가발장사를 했다. 공치는 날이나, 암호 같은 가발의 알파벳기호 때문에 애를 먹을 때는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열린 가방이 눈에 밟힐 때도 많았다. 범죄의 유혹은 그토록 질기고 무서웠다.
그때마다 더 이상 거짓말하지 않아도 되는 삶, 아침 8시에 나와 밤까지 땀 흘려 일하고 매달 100만원씩 버는 일상을 그는 견뎠다. "마음 잡았다는 소식에 연락 끊긴 친구도 찾아오고, 버스비가 얼마인지 지하철 환승역이 어디인지도 처음 알았어요. 아기가 걸음마 떼듯 '이게 사는 거구나' 싶었죠."
그러나 '엄마'의 출현은 이씨의 힘겨운 발걸음을 가로막는 장애였다. "20년 넘게 정말 딸처럼 생각했다면 새 사람이 된 걸 축하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울먹였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이씨는 평생 피해 다녔던 경찰에 도움을 구하기로 했다. 경찰은 이날 이씨의 진술을 토대로 보복 폭행 및 소매치기 관련 수사에 착수했다.
인터뷰 내내 이씨는 회한의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제 사연이 세상에 알려지면 더는 찾아오는 예전 동료가 없겠죠, 그 세계에서 받아주지도 않을 거고. 땀 흘려 벌어보니 저 때문에 돈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드려야 할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김혜경기자 thanks@hk.co.kr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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