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 전통예술 교육이라는 게 있나? 예술을 하겠다는 젊은이들마저 대학 진학을 위해 현대 서양미술에만 목을 매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전통이 사라져 가고 있는 데 대해 안타까움이 든다.”
조선시대 마지막 어진화가(임금의 초상을 그리는 화가)였던 이당 김은호(1892~1979) 화백의 제자 규당 한유동(1913~1994) 선생을 사사한 소남(素南) 서동관(徐東官ㆍ62) 화백은 자신이 평생의 업으로 삼고 있는 한국 전통미술이 소외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는 찬밥 신세인 전통화가 오히려 외국에서는 인정을 받고 있다. 모두들 ‘추상이다, 현대다’ 하면서 유행만 좇다 보니 막상 우리 전통의 뿌리는 사라지고 있다.”
지난해 갑작스런 신장암 발병으로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오히려 더 힘있게 붓을 들고 있는 서 화백을 서울 광장동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막 화실을 새롭게 정리하고 있었다.
우리 자연을 전통 산수화풍으로 그리면서도 독자적인 현대적 필법을 구사하는 서 화백은 국내보다 외국에서 훨씬 더 많이 알려진 작가다. “미술을 해서 먹고 살기 시작했다”는 25세 이후 그는 일본과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명성을 쌓아왔고, 1991년 이후에는 국내 개인전을 열 틈조차 없었다. “한때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현장에서 그림을 그려 바로 전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 그림을 가지고 일본을 한 번 ‘정복’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해외로 나가기로 했다”고 그는 말했다.
실제 그의 명성은 일본에서는 놀라울 정도다. 일본 현지에 500여명 이상으로 구성된 팬클럽까지 결성돼 있다. 현직 의원, 기업체 회장, 가수 등으로 구성된 팬클럽은 웬만한 일본 작가의 경우보다 탄탄하다. 이들은 해외 아트페어 등에 서 화백의 작품이 출품되면 단체로 현지에 가서 작품을 구매하기도 한다. 1980년대 말 독일에서 통독 기념 순회전을 열었을 때는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그의 후원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서 화백은 “1990년대부터는 아예 일본에 터를 잡고 작품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이제 국내로 복귀한다. 계기는 뜻밖에 찾아왔다. 서 화백은 “지난해 갑자기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갔더니 신장암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의료진은 그에게 2개월 시한부 인생 판정을 내렸다. 신장과 쓸개를 반이나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은 그에게 병원은 다시 폐에까지 암세포가 번졌다고 했다. “작가로서 가졌던 열망의 끝이 허망하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하지만 절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항암 치료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병원을 떠나 집에서 요양을 하면서 붓을 들었다. 오히려 다시 힘이 생겼다.”
그렇게 다시 돌아왔지만 그 사이 한국은 많이 변해 있었다. 특히 전통미술이 한귀퉁이로 밀려난 미술계를 보며 그는 서글픔을 느꼈다고 했다. 처음 붓을 잡던 시절 스승에게서 기본기를 배우고 그 기본에서 벗어나면 그림 자체가 흔들린다고 느꼈던 때와 비교하며 서 화백은 “무엇보다 획일적인 교육의 문제가 심각하다. 대학에 동양화과가 있지만 그곳에 과연 전통이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서 화백은 투병 중에도 지금 20여년 만의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에 앞서 4일부터 서울 코엑스몰에서 열리는 ‘서울오픈아트페어(SOAF) 2011’에도 참가하는 등 조금씩 활동을 재개하고 있다. “이번 아트페어에도 다섯 작품을 내야 하는데 힘이 달려 두 작품밖에 못했다. 그림으로 감동을 주고, 그 그림에 책임을 지는 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이 살아 있다는 것, 산수화의 맥이 남아 있다는 것을 내 작품으로 보여주고 싶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