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서예를 통해 일하며 얻은 두통과 만성피로를 이겨냈죠. 맑은 하늘을 보니 왠지 좋은 작품이 하나 나올 것 같네요."
윤한기(73)씨가 명심보감의 한 구절 '심무물욕건곤정'(心無物慾乾坤靜ㆍ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으니 하늘땅이 고요하고)을 적어 내려갔다. 10분 넘게 정신을 집중하던 윤씨는 화선지를 날리는 황사 바람에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예서체의 정갈한 글씨를 본 다른 참가자들의 감탄이 이어졌다.
1일 오전 11시 근로자의날을 맞아 평소 글재주, 그림솜씨 등을 발휘할 기회가 없던 근로자들을 위한 자리가 마련됐다. 한국노동문화예술협회가 주최하고 고용노동부 등이 후원하는 '2011 근로자문화큰잔치'가 서울 여의도공원 전통문화의숲에서 열린 것. 백일장 사생 휘호 촬영 등 4개 분야의 출품작을 대상으로 전문심사위원들의 평가도 이뤄졌다. 근로자와 가족 단위 참가자 100여명은 평소 취미로만 즐기던 예술작업을 하며 팍팍한 일상을 잊고 여유를 찾았다.
호수 앞에 자리를 잡고 수묵화를 그리던 김순구(63)씨는 "문화센터에 다니며 10년간 갈고 닦은 실력을 뽐내겠다"며 "팍팍한 일상이지만 대회를 통해 친구도 사귀고 스트레스도 풀고 가겠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을 향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전직 케이블피복제조업체 사장 박래원(85)씨는 "창작에 몰입해 이리저리 자세와 표정을 바꾸는 모습들이 재미있어서 담고 있다"며 "작품을 소재로 또 하나의 사진작품을 만들고 있는 셈"이라고 웃었다.
근로자들을 위한 문화행사인 만큼 참가자들은 즐거움 속에서도 일의 고단함을 이야기했다. 방직업체에서 8년간 일하며 공장 내 유독가스에 신경계가 파괴되는 병을 얻었다는 윤한기씨는 "몸이 망가져 20년째 약을 먹고 있다. 산업재해를 인정해 주지 않는 풍토 때문에 다른 직업을 구하지도 못했다"고 호소했다. 그는 "근로자들은 휴일엔 피로를 풀기도 바빠 그간 문화생활을 할 여력이 없었다"고도 했다.
가사노동을 당당한 근로라고 여기는 주부도 있었다. 공원 내 호숫가에서 수채화를 그리던 이언회(50)씨는 "얼마 전 아이 학교에 갔더니 어머니 직업란에 '가사업'이라고 적힌 생활기록부를 보고 기분이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이날 분야를 막론하고 최고의 작품에 수여되는 대상은 휘호를 써낸 장선주(47)씨에게 돌아갔다. 제지업체 직원으로 퇴근 후 10년간 붓글씨를 배웠다는 그는 "회사와 집만 오가는 쳇바퀴 같은 생활을 벗어나 내 자신을 위해 투자한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 같다"고 했다.
김현수기자 ddacku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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