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21ㆍ고려대)는 허공에 괸 팔에 살포시 얼굴을 대며 연기를 끝냈다. 세계피겨선수권대회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의 대미에 걸맞은, 좌중을 숙연하게 만드는 연기. 지젤이 연인 알브레히트의 배신을 알고 자결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아돌프 아당 작곡의 지젤은 1841년 프랑스 파리 가르나에 극장에서 초연한 낭만 발레. 시골 처녀 지젤은 귀족 알브레히트와 사랑에 빠지지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충격에 목숨을 끊는다. 이후 지젤은 유령이 돼 알브레히트를 다시 찾는다. 김연아의 연기는 1막까지. 유령으로 부활해 절절한 사랑을 이어가는 2막은 그의 연기에는 없다.
그러나 경기장을 가득 메우다시피 한 팬들은 지젤로 변신한 김연아를 기어이 다시 살려냈다. 언제나처럼 환호성이 터졌고 꽃과 인형이 비처럼 쏟아졌다. 자신의 연기에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던 김연아도 이내 미소를 되찾았다.
‘피겨퀸’의 위엄은 1년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김연아는 29일(한국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의 메가스포르트 아레나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2011 세계피겨선수권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기술 점수 32.97점에 구성 점수 32.94점을 더해 65.91점으로 1위. 2위는 김연아에 0.33점 뒤진 안도 미키(일본ㆍ65.58점)였고 김연아의 동갑내기 라이벌 아사다 마오(일본)는 58.66점으로 7위에 그쳤다.
김연아의 65.91점은 지난해 2월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올린 78.50점에는 못 미치지만 2009년 12월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얻은 65.64점을 넘는 괜찮은 점수다. 30일 오후 6시30분부터 시작하는 프리스케이팅에서 여세를 잇는다면 2009년에 이어 2년 만의 세계선수권 정상 탈환이 어렵지 않다.
김연아가 대회에 나서기는 13개월 만. 지난해 2월 밴쿠버올림픽 금메달로 필생의 꿈을 이룬 김연아는 올림픽 직후 벌어진 토리노세계선수권에서 은메달을 땄다. 올림픽 후유증을 딛고 건져낸 값진 금메달이었다. 이후 김연아는 모든 대회를 거르고 훈련과 휴식을 병행해 왔다.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그랑프리 파이널, 4대륙선수권까지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김연아였다.
긴 잠에서 깬 김연아는 은퇴설을 일축하고 다시 얼음 위에 섰다. 일본 대지진 여파로 인한 일정 변경으로 김연아의 공백은 1년에서 13개월로 늘었지만 그는 우리가 기억하는 여왕의 모습 그대로 돌아왔다. 지난 시즌 매혹적인 검은 의상으로 007 본드걸을 표현했던 김연아는 이번에는 검고 짙푸른 지젤로 변신했다. 연기 순서는 5조 6번째. 전체 30명 중 마지막이었다. 때문에 빙질은 최상과 거리가 멀었고 심리적 부담감도 만만치 않았지만 김연아는 1위를 놓치지 않았다.
첫 과제는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루프. 김연아는 트리플 러츠에서 주춤한 탓에 세 바퀴를 채 못 돌았고 오른발 착지도 불안해 넘어질 뻔했다. 예상 밖의 실수였다. 그러나 김연아는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두 번째 과제인 트리플 플립에 더블 토루프를 즉흥적으로 추가하는 재치를 발휘했다. 남은 5개 과제는 흠잡을 데 없이 완수. 연기를 마친 뒤 키스 앤드 크라이 존에서 점수를 확인한 김연아는 다행이라는 듯 가슴에 손을 얹고 활짝 웃어 보였다.
양준호기자 pire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