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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철의 문단골 60년 이야기] <4> 진보당 사건에 대한 첫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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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철의 문단골 60년 이야기] <4> 진보당 사건에 대한 첫 고백

입력
2011.04.26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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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ㆍ19는 그 바로 10년 전에 북에서 홀몸으로 남쪽으로 내려온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 뒤의 우리네 민주화 성과에만 모두 자족하고 있다는 점에, 그 어떤 역사적 상투성 같은 것이 보여졌었다. 4ㆍ19의 끝 마무리가 그렇게 쉽게 맺어졌다는 그 점이 우선 요행으로 받아들여졌다.

요컨대 그것은 당시의 독재자 이승만이 금방 권력에서 물러난 데서 비롯되었다. 즉 그이가 젊었을 적부터 미국에서 살며 철학박사 학위까지 받아 미국 사회에 속속들이 길들여져 여론, '언론'이라는 것을 귀히 여기는 양식(良識)의 소유자였다는 점, 그렇게 하와이로 쉽게 망명하였다는 점, 바로 이 점이야말로 요행이었던 것이다.

그 해 4월 19일. 그 날, 나는 적선동 길가의 구경꾼들 틈에 섞여 단지 재미있는 구경하듯이 서 있었고 이게 과연 어떤 식으로 마무리 될 것인가 못내 궁금해하면서 그저 그런 정도의 호기심에서 더 나가 있지는 않았다. 홀몸으로 북에서 월남해온 평균적인 서울 시민이었을 뿐이고 아직 미혼이라 먹여 살릴 처 자식은 없었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먹고 사는 데만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렇기만 했을까. 이미 5년 전인 1955년부터 이 나라 작단의 가장 젊은 소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나도 이미 나름대로의 정치적 색채가 전혀 없지는 않았던 것이 아닐까.

이 점을 두고는 비로소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밝히거니와, 놀라지 마시라, 1958년 진보당 사건이 터지기 직전인 1957년 겨울에 나는 우연히도 그 진보당의 '비밀 청년회' 회원으로 가입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4ㆍ19 직전의 그 상황에서, 진보당 사건이 처음 터질 때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 했었겠는가. 며칠 동안 잠을 설쳤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비밀 청년회' 문제는 수사기관에 포착되지 않아 그대로 유야무야로 넘어가 나도 나대로 안도의 큰 숨을 내쉬었고 그 뒤로 그 일은 나 자신부터 아예 없었던 일로 지금까지 완전히 잊고 지냈다.

1957년 초 겨울이었다. 그 무렵 나는 을지로 3가 근처 광문사라는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아예 그 숙직실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저녁 그 근처에서 강원도 통천이 고향이라던 상이군인 출신 임성룡을 만났다. 그는 나 보다 두어 살 위로 1952년 동래 온천장의 미군 기관에 경비원으로 근무할 때 동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이도 이미 내가 소설가로 등단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아주 반색을 하며 당장 어디론가 같이 가자고 하였다. 어디냐니까, 글쎄 가 보면 안다, 가면 너도 틀림 없이 좋아할 것이라고 하여 그렇게 나도 무심히 그이를 따라 갔다.

가 본즉, 시청 뒤의 용금옥 맞은 편의 천정이 낮은 옴팡집인데, 예닐곱 청년들이 벌써 모여 있었고 그 한 가운데 몸집이 우람하게 생긴 함경도 북청 사람이라는 30대 중반의 한 사람을 소개 받았다. 이름이 이옥규라고 하였고 일제 치하 말기에 총독을 살해하려는 목적으로 서울로 잠입해 들어 왔다가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다가 금방 해방을 맞아 풀려 나와서 지금은 조봉암 선생 휘하의 '비밀청년회' 회장이라고 했다.

첫 눈에 보기에는 사람이 조금 허황해 보였다. 사회주의 어쩌고, 지껄이는 것도 속 알맹이가 차 있어 보이지 않았다. 북에서 5년 동안 겪으며 그 쪽 체제의 '볼세비키 당사'며 '레닌주의의 제 문제'며, <강철은 어떻게 단련 되었는가> 라는 오스토롭스키의 소설이며, 시모노프며, 마야콥스키와 이사콥스키의 시며, 막심 고리키의 소설 등을 노상 읽었던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꽤나 유치해 보였다. 나는 돼지족발과 빈대떡을 안주 삼아 막걸리 몇 사발을 마시고는 사회주의라는 거며 공산주의, 특히 사회민주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들인 베른슈타인이며 카우츠키며, 그때까지 나 나름대로 심심풀이 삼아 읽어 두었던, 혹은 얻어 들었던 것들을 죄다 인용해가며 열 나게 지껄이고 마음껏 털어 놓았다.

그렇게 자리는 일거에 나 혼자 독차지 하다시피 되었다. 거기 모인 누구 하나 그런 것들에는 죄다 무식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한참 뒤에 이옥규씨가 아주 정색을 하며 갑자기 나지막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물었다. "오늘 참으로 잘 만났오. 한데, 요즘 형 한테 혹시 어려운 일이 있거든 말해보오." 그 억양이나 목소리가 너무 진지 하여서 나도 술이 확 깨는 느낌 섞어 솔직히 말했다. "아직 저는 이북 피난민 신세로, 이 나라 적(籍)을 제대로 못 갖고 있습니다만"이라고 하자 대뜸 "알았오"하곤,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이름과 고향 쪽의 정확한 주소와 지금 기거하는 곳을 적어 달라고 하여 나도 휭 하게 술 기운에서 벗어나 그것들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적어줬다.

그 뒤 1주일 쯤 지나서였다. 하루 일과가 끝나 그 광문사 숙직실을 혼자 지키고 있는데 회사 출입문 쪽에 인기척이 들렸다. 무심하게 문을 열었더니 키가 헌칠한 경찰복 차림의 한 사람이 내 이름을 대며 지금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질겁을 하며 우선 겁부터 났다. 그 무렵에 병역 기피자 단속이 원체 심해서 그런 쪽으로 우선 짐작 했던 것인데, 중부 경찰서에 있다면서 웬 봉투 하나를 건네주고는 아무 말 없이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비로소 그 두툼한 봉투를 뜯어 보며 나는 다시 기겁을 하게 놀랐다. 그 속에는 '중구 장춘동 1가 37번지'로 가호적 등본과 기류계, 병적계, 주민증 등등 일체가 들어 있었고 그렇게 나는 비로소 정식으로 이 나라 대한민국의 국적(國籍)을 갖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물론 그 진보당의 '비밀청년회' 회원으로 가입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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