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휴양도시 세부에서 남쪽으로 20㎞ 떨어진 나가시(市)의 한국전력 세부 화력발전소 건설 현장. 최근 찾아간 이 곳엔 110㎙ 높이의 붉은 색 줄무늬 굴뚝과 50㎙ 높이의 대형 보일러 철제탑 2개 동이 쪽빛 바다 옆에 우뚝 서 있다. 그런데 연기가 전혀 나지 않는다.
"가동하지 않고 있느냐"는 질문에 문종우 한전 세부화력건설사무소장은 "풀 가동중"이라고 답했다. 그는 "친환경 유동식 보일러를 채택해 기존 보일러에 비해 황산화물 배출량은 10분의 1, 질소산화물은 5분의 1로 줄인 덕택에 연기가 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석탄을 잘게 부숴 사용하는 미분탄 보일러와 달리 유동식은 보일러 밑에서 공기를 주입, 석탄과 석회석을 공중에 띄운 채 태운다.
한전이 이 곳에 발전 플랜트를 짓게 된 것은 심각한 전력난 때문이다. 필리핀은 전력난으로 정전 사태가 끊이지 않고 있는데다 1,700여개의 섬에 해저케이블로 전기를 공급하다 보니 전기요금도 우리보다 2~10배까지 높은 상황.
그럼에도 적지 않은 필리핀 발전소들은 발전단가가 높은 경유를 원료로 쓴다. 발전과 송ㆍ배전, 판매 권한이 국내ㆍ외 수 백개 업체에 분산돼 있다 보니 업체들이 초기 투자비가 적은 경유발전소를 많이 지은 결과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이 한전엔 오히려 기회요인으로 작용했다. 경유 발전소의 발전단가는 석탄 발전소의 2배다. 원가는 경쟁사의 절반 수준이고, 판매가는 국내보다 3배나 높다면 발전 플랜트의 수익성은 높아질 수 밖에 없다. 실제로 한전 세부화력발전소의 사업비는 4억5,000만달러지만 운영권이 보장된 2036년까지 25년 동안의 판매 예상 수익은 32억 달러에 달한다. 순수익도 8억5,000만달러로 예상된다.
세부 플랜트 사업이 주목 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모두 우리나라 기업들이 담당하고 있다는 데 있다. 한전에서 전체 사업을 총괄하고 현대엔지니어링이 설계ㆍ감리, 동서발전이 운전ㆍ보수, 두산중공업이 시공ㆍ건설을 맡고 있다. 한 마디로 향후 해외 발전 사업 성공의 시금석이 될 사업이다. 물론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관광지와 가깝다 보니 환경단체들의 요구는 상상을 뛰어 넘었다. 그러나 한전이 유동식 보일러를 통해 친환경 발전소를 짓자 주민들의 반응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오히려 주민들이 "만성적인 전기 공급부족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줘 고맙다"는 인사를 건넬 정도다.
기자의 다음 행선지는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스타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2시간여를 달려야 나오는 바탕가스시(市). 이 도시에서 다시 동쪽으로 굽이굽이 해안길을 따라 한 시간 가까이 곡예운전을 하면 나타나는 맹지에 한전 일리한발전소가 자리잡고 있다. 심해 가스전으로부터 천연가스를 수송해 발전을 한 뒤 마닐라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고 있는 시설이다.
오지 중의 오지에 있지만 세계 최대의 가스복합화력발전소이자 2003년 에너지 전문지 <파워> 가 선정한 세계 톱12 발전소 중 하나다. 무엇보다 한전에겐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이 발전소는 지난해 매출 790억원, 순이익 477억원의 탁월한 수익성을 기록했다. 파워>
어떻게 이런 수익률이 가능할까. 우선 원료인 천연가스를 필리핀 정부가 무상 공급해 주고 있다. 1996년12월 만성적인 전력난에 시달리던 필리핀 정부는 천연가스를 전기로 바꾸는 게 급선무라고 보고 이처럼 파격적인 조건의 발전소 건설 프로젝트를 발주했다. 한전은 당시 국제경쟁입찰에서 이를 수주했고, 프로젝트파이낸싱(PF)을 통해 7억2,100만달러를 조달해 2002년 발전소를 준공했다. 이후 매년 큰 수익이 나며 이미 빌린 돈의 70% 이상을 갚았다.
발전소 건설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워낙 오지라 길을 새로 내는 데도 난공사가 이어졌고 무장 반군들이 자주 출몰해 인명 피해까지 났다. 그러나 다른 나라 직원들이 현장을 버리고 줄행랑을 친 반면 한전 직원들은 발전소를 지켰다.
지금도 발전소 운영을 총괄하기 위해 파견된 9명의 한전 직원은 가족들과 떨어진 채 외로움과 싸워가며 플랜트 현장을 사수하고 있다. 황규병 발전소장은 "찾아오는 이 하나 없는 오지지만 이곳에서 필리핀 전력 수요량의 12%인 1,200㎿의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며 "한국전에 참전, 우리를 도왔던 나라에 이제는 우리가 전기를 공급하고 있고 경제 발전에도 기여하고 있다는 데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복렬 한전 필리핀법인장은"에너지 플랜트 수출은 이제 단순한 에너지 공급을 넘어 해당 지역 주민 삶의 질을 향상시키면서 경제발전에도 기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나가·일리한(필리핀)= 글·사진 박일근 기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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