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 총칼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에게 그 해 겨울 가장 무서운 적은 북한이 아니었다. 바로 쌀이었다. 80년 여름 유례없는 냉해로 쌀 생산량(330만톤)이 전년의 3분의2 수준으로 급감, 민심이 흉흉했다. 농림부 고위 공무원들이 미국 코넬 등 곡물메이저에 구걸하다시피 매달려 쌀을 구해왔는데, 구매가격은 국제시세의 2.5배인 톤당 500달러였다.
#. 쌀이 남아돈다지만 2010년 현재 대한민국의 곡물자급률은 26.7%.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3개 회원국 중 28위로 하위권이다. 게다가 해외에서 들여오는 곡물의 73%를 미국 카길, 프랑스 드레퓌스 등 자본논리에 충실한 국제 곡물메이저에 의존하고 있다. 반면 프랑스는 곡물자급률이 329%를 기록하고 있으며 독일과 미국, 영국 등도 모두 자급률이 100%가 넘는다.
정부가 한국의 숨겨진 아킬레스건인 식량안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간 기업과 함께 국제 곡물회사를 세운다. 기상이변과 수요 증가로 최근 국제 곡물가격이 급등하면서 30년전의 악몽이 되살아날 조짐을 보이자, 유사시 부족한 곡물(2015년 최대 400만톤)을 보내줄 공급처를 확보하겠다는 것.
곡물회사, 식량안보의 방파제
농업유통분야 공기업인 농수산물유통공사(aT)는 25일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삼성물산, 한진, STX 등 3개 민간기업과 국가곡물조달 시스템 투자 협정을 체결했다. 이들은 또 29일 세계 주요 곡물회사가 몰려있는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aT그레인컴퍼니'이라는 현지법인을 세우고 안정적 식량확보에 나선다.
aT 등은 올해 470억원을 시작으로 2015년까지 총 3,000억원을 투자해 국내에서 소비되는 곡물의 30%를 조달한다는 목표를 세워 놓고 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시카고에서 현지 중소 곡물업체를 인수ㆍ합병(M&A)해 2015년에는 연간 400만톤(콩 50만톤ㆍ옥수수 250만톤ㆍ밀 100만톤)을 확보해 식량 자주율을 47%까지 높일 것"이라고 말했다.
'엘리베이터'가 사업 성공의 관건
대한민국 1호 곡물회사가 M&A로 미국 시장에 진출하려는 건 진입장벽 때문이다. 자동차는 공장을 새로 지어도 진출할 수도 있지만, 곡물 유통산업은 '엘리베이터'로 불리는 대당 가격이 최고 2,000억원인 곡물처리 장치와 유통망이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aT관계자는 "현지에 엘리베이터를 지을 수는 있지만 인근 농가와 중간 유통망을 확보하기가 어려워, 기존 엘리베이터를 10대 가량 인수키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80년대 5공 정권의 압력을 받은 선경그룹(현 SK그룹)이 미국에서 3만6,000여톤의 옥수수를 생산하고도 엘리베이터를 임대하지 못해 현지에서 매각했던 실패 사례도 참고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여전히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미국 곡물시장 포화상태인데다가, 기존 업체가 쌓아 놓은 진입장벽이 워낙 높기 때문이다. 2000년부터 관련 업계에서 일해온 한 관계자는 "한국은 곡물회사가 없어 사업계획도 세울 수 없을 정도인데, 허약한 네트워크로 어떻게 현지 업체와 M&A까지 추진할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부와 aT는 사업의 당위성을 역설한다. 이필형 aT 국제곡물사업추진팀장은 "돈이 있어도 곡물을 살 수 없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며 "지금이라도 이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 엘리베이터란
분류ㆍ저장 시설을 갖춰 곡물을 모아 한 곳에서 처리하는 시설. ▦산지 ▦강변 ▦수출엘리베이터로 구분된다. 생산지에 있는 산지 엘리베이터는 비교적 소형으로 인근의 곡물을 모으며, 강변 엘리베이터는 산지 엘리베이터의 곡물을 모아 선박을 이용해 초대형 엘리베이터인 수출 엘리베이터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