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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의 시로 여는 아침] 그 놋숟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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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의 시로 여는 아침] 그 놋숟가락

입력
2011.04.25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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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두석

그 놋숟가락 잊을 수 없네

귀한 손님이 오면 내놓던

짚수세미로 기왓가루 문질러 닦아

얼굴도 얼비치던 놋숟가락

사촌누님 시집가기 전 마지막 생일날

갓 벙근 꽃봉오리 같던

단짝친구들 부르고

내가 좋아하던 금례 누님도 왔지

그때 나는 초등학교 졸업반

누님들과 함께 뒷산에 올라

굽이굽이 오솔길 안내하던 나에게

날다람쥐 같다는 칭찬도 했지

이어서 저녁 먹는 시간

나는 상에 숟가락 젓가락을 놓으며

금례 누님 자리의 숟가락을

몰래 얼른 입속에 넣고는 놓았네

그녀의 이마처럼 웃음소리 환하던

부잣집 맏며느리감이라던 금례 누님이

그 숟가락으로 스스럼없이 밥 먹는 것

나는 숨막히게 지켜보았네

지금은 기억의 곳간에 숨겨두고

가끔씩 꺼내보는 놋숟가락

짚수세미로 그리움과 죄의식 문질러 닦아

눈썹의 새치도 비추어보는 놋숟가락.

● 숟가락이 있지요. 한 눈 가리고 시력 검시를 하던 숟가락. 이 시에 나오는 놋숟가락으로 마음 한 쪽을 가리면 추억 한 조각이 명징하게 떠오를 것 같네요. 착한 악동, 순정에 세월, 어디 꼭 그렇겠습니까. 맏며느리감이라던 금례 누님은 혹, 몰래 얼른 입속에 넣고는 놓은 숟가락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한 것은 아닐까요.

놋숟가락. 제삿날 탕국 앞에서 만나던. 조상을 불러내 대면 하던. 숟가락. 내 손을 닮은, 내 혀를 닮은, 숨킨 마음을 닮은, 아주 건조한, 아주 젖은 짧은 길, 깊은 길, 없는 길, 다 들을 수 있고 다 놓을 수 있는, 물이 빚은 도구의 시발 숟가락, 저 놋빛!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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