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관아기 시술에 어렵게 성공했다. 병원에서 들으니 시험관에서 자란 배아(수정란)를 자궁에 넣기 전에 일부분을 떼어 배아줄기세포를 만들 수 있다. 이 세포를 보관해두면 나중에 혹시라도 아기나 우리 가족들이 몹쓸 병에 걸렸을 때 이식이 가능하다고 한다. 일부분을 떼어낸 배아라도 자궁에 착상시키면 아기는 정상적으로 태어난단다. 별도 비용은 안 드는데, 멀쩡한 배아에 생채기를 내는 것 같아 망설여진다. 하지만 보험 드는 셈 치고 가족을 위한 배아줄기세포를 만들어두면 든든할 것도 같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분만 직후 탯줄과 태반에서 제대혈을 꺼내 보관하듯 시험관아기 시술을 받은 부부가 아기의 배아줄기세포를 보관할 수 있다면 말이다. 기술적으론 가능하다. 윤리적으로도 가능할지 곧 결정된다.
8조각 중 한 조각
차병원과 차의과학대 연구진이 시험관아기 시술자 중 희망하는 부부에게 배아줄기세포를 만들어주겠다고 나섰다. 단 배아를 이용하기 때문에 먼저 보건복지부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연구진의 승인 신청에 복지부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최종 결정을 27일 열리는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로 넘겼다. 이를 계기로 다시 한번 배아줄기세포 연구와 생명윤리에 관한 논란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논란의 핵심은 배아의 일부분을 생명체로 보느냐다. 난자와 정자가 결합해 생긴 배아는 자라면서 갈라진다. 완전히 떨어져나가는 건 아니고 여러 조각이 붙어 있는 형태가 된다. 2조각, 4조각으로 갈라졌다 난자 정자 결합 후 3일째엔 8조각이 된다(8세포기). 각 조각은 ‘할구’라고 부른다.
차병원과 차의과학대 연구진에 따르면 8세포기 때 할구 하나를 떼어 실험실에서 7일 정도 배양하면 배아줄기세포가 생긴다. 이를 추출해 보관하면 태어날 아기를 위한 맞춤형 줄기세포가 되는 것이다. 자기 세포니 이식해도 아무런 면역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
정형민 차의과학대 교수는 “배아줄기세포는 이식 후 하루 안에 생명을 위협하는 초급성 면역거부반응을 일으키는 면역유전자가 없기 때문에 태어날 아기와 비교적 면역유전자가 비슷한 가족이나 친척에게도 이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친척이 아니어도 우연히 면역유전자가 유사한 다른 사람에게도 이식 가능하다. 연구진은 할구에서 추출한 배아줄기세포 하나의 면역유전자가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0.5~1%와 유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배아줄기세포 하나를 확보해두면 많게는 인구의 1%가 이식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할구 하나를 떼어내고 남은 배아는 자궁에 착상시키면 태아로 자란다.
할구, 생명인가 아닌가
국내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은 배아줄기세포를 만들기 위해 생명체로 자랄 수 있는 배아(신선배아)를 이용하는 걸 금지하고 있다. 줄기세포를 추출하고 나면 배아가 파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자와 수정되지 않은 난자(미수정란)나 불임치료 후 남아 폐기할 예정인 배아(냉동배아)만 쓸 수 있게 돼 있다.
연구진은 할구는 신선배아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동율 차병원 책임연구원은 “8세포기 배아에서 떼어낸 할구 하나는 아무리 배양해도 생명체(태아)로 자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할구 역시 애초에 태아로 자랄 수 있는 배아에서 빼냈기 때문에 줄기세포를 만드는 목적으로 사용해선 안 된다는 반대론도 거세다.
8세포기 배아에서 할구를 하나 떼고 나머지를 착상시키면 그게 과연 항상 정상적인 태아로 자랄 수 있겠느냐는 우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 연구원은 “현재 시험관아기 시술을 한 고령 산모들이 받는 착상 전 유전자검사도 실제로 8세포기 배아에서 할구를 하나 떼서 한다”며 “남은 배아에 해가 없다는 건 이미 임상적으로 증명된 셈”이라고 설명했다.
고령 산모뿐 아니라 유전병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시험관아기 시술로 얻은 배아에서 할구를 떼 유전자검사를 해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식에게 유전병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처럼 어차피 할구를 떼 유전자검사를 하는 부모들 가운데는 배아줄기세포를 따로 보관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을 거라는 게 연구진의 예상이다.
안전성 vs 치료가능성
학자들 사이에는 안전성이 확실히 입증되지 않은 배아줄기세포를 치료 목적으로 확보하려는 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있다. 배아줄기세포는 인체의 모든 세포로 자라고 무한히 증식하는 특성이 있다. 때문에 이식 후에도 무제한으로 증식해 종양(암덩어리)이 될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치료제로서의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할구 추출이 승인될지, 줄기세포 연구자들과 생명윤리 전문가들의 눈이 국가생명윤리위원회에 쏠려 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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