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일제는 순종(純宗)에게 한일병합 조약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순종은 아버지 고종(高宗)이 폐위된 후 왕권을 물려받으며 조선왕조의 마지막이 될 것을 직감했지만 일본의 요구에 순순히 따를 수는 없었다. 순종은 조약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으며, 결국 총리대신 이완용이 대신 서명했다. 조선왕조의 치세가 끝을 맺은 것이다.
1926년 순종은 병세가 악화되자 조칙을 내려 유언을 전했다. "병합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림으로써 이른바 이전에 이루어진 한일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아, 국민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지하에서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들을 도우리라."
대한제국의 융희황제(隆熙皇帝)이기도 한 순종은 그 해 4월25일 승하했다. 고종과 명성왕후의 아들이며 고종의 장성한 자녀 중 유일한 적자였다.
일본은 일찌감치 순종의 이복동생이자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을 강제로 일본에 보냈다.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라는 일본 왕녀와 결혼한 것도 강제였다. 나약했지만 꺾이지 않으려 했던 순종과 달리 영친왕은 일본의 순치를 받아들였다. 일본 황실로부터 귀족 대우를 받으며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제1항공군사령관(육군 중장) 지위에까지 오르는 등 물질적으로 일본 황족보다도 풍족한 생활을 이어갔다. 아버지처럼 따르던 이토 히로부미를 안중근이 암살하자 매우 슬퍼하며 석 달 동안 상복을 벗지 않았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영친왕은 일본 패망 이후 황족의 지위도 잃고 귀국도 거부당하면서 심신이 쇠락해 갔다. 1963년 뇌출혈로 인해 혼수상태인 채로 귀국하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그나마 끝까지 그의 생계와 명예를 지켰던 것은 부인 이방자 여사였다.
이 여사는 메이지 천황의 친족으로 히로히토 황태자의 강력한 배우자 후보였지만 정치적 필요에 의해 대한제국 황태자와 결혼했다. 황족의 명예와 재산을 몰수당한 후에도 영친왕의 곁에서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다. 이여사는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야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다.
국가의 생활보조금으로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농아와 소아마비 장애인 재활사업에 열정을 보인 이여사는 장애인들의 어머니로 존경 받았다. 남편인 영친왕은 1970년 5월1일 숨을 거뒀으며, 창덕궁 낙선재에서 생활하던 이 여사는 1989년 4월30일 경기 미금시 금곡동 홍유릉에 남편과 함께 자리했다.
원유헌기자 youhone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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