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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화 감독의 액션영화에 바친 60년] <9>'비련의 섬'(1958)의 '따귀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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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화 감독의 액션영화에 바친 60년] <9>'비련의 섬'(1958)의 '따귀녀'

입력
2011.04.24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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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 제 마음이 자꾸만 그 쪽으로 빠져들고 있어요. 창가에 흐르는 빗방울을 보며 내 사랑을 세어 봅니다. 안녕! 감독님."

어느 여배우가 나에게 준 쪽지에 적힌 내용이다. 영화감독을 하다 보면 여배우의 유혹이 있기 마련이다. '비련의 섬'(1958)의 여주인공 김삼화는 내가 그녀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나는 여러 일정과 밀려오는 차기 작품 선정문제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보니 그녀에게 관심을 둘 겨를이 없었다. 더구나 내 성격이 그다지 말랑말랑하지도 않아 그나마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아닌 말로 영화감독이 '기쁨조'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김삼화의 심기가 불편해지면서 토라진 것 같았다. 제아무리 힘을 지닌 감독이라지만 나는 성격상 남에게 결례하거나 감정을 상하지 않도록 늘 경계하고 조심하며 현장을 이끌어 왔다.

촬영장으로 배우를 데려오는 일은 제작부장이나 진행 담당의 직무이고 책임이었다. 그들이 제 역할을 못했기 때문에 답답한 나머지 연출부원이었던 임권택이 나섰던 모양이다. 임권택과 김삼화는 나이가 비슷했다. 그런데 김삼화가 처음부터 임권택에게 반말로 대했고, 촬영을 설득하러 세 번째 갔는데도 "안 해! 못해!"라며 계속 반말로 외쳐댔다. 자존심 상한 임권택이 앞뒤 생각 안하고 김삼화의 뺨을 때리며 일이 터졌다. 당시 임권택은 어차피 연출부 막내이니 뺨 한번 때리고 영화 일은 그만두면 된다는 심사였다고 했다.

그런데 그 때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제작부장이 창 밖에서 피식 웃다가 김삼화의 눈에 띄고 말았고, 대선배 배우 최명수는 "개 같은 X"이라는 욕설을 퍼부었다. 결국 김삼화는 촬영현장을 떠나버렸고 촬영이 중단되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 버리고 말았다.

'비련의 섬'은 당시 안양촬영소에서 촬영 중이었다. 사건이 있던 시간 나는 김승호 출연장면을 찍고 있었고, 촬영현장과 김삼화가 머물던 분장실(본관건물에 있었다)이 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임권택을 책망하며 김삼화가 요구하는 대로 임권택과 제작부장, 최명수가 모두 당장 가서 사과하라고 소리쳤다.

남은 촬영 분을 끝내야 한다는 책임감에 그들 모두는 김삼화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김삼화는 촬영장 복귀를 전제로 임권택과 제작부장의 무릎을 꿇게 했으며 각각의 뺨을 세대씩 때렸다. 최명수는 '개'를 운운한 벌로 그녀 앞에서 개처럼 기어야만 했다.

세 사람의 참혹한 벌을 대가 삼아 촬영은 이어질 수 있었다. 영화의 완성을 위해 모든 희생을 담보로 했다지만, 내심 언짢고 불편한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여배우를 때린 임권택도 잘못했지만 촬영을 안 할 거라면 왜 이틀씩이나 촬영을 방해했는지,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옳은 것인지, 김삼화의 행동에 나는 계속 의문이 들었다.

대배우인 김승호 최명수 등이 그렇게 설득했는데도 고집을 부리고 제멋대로 굴었으니 제아무리 학력과 미모를 갖춘 재원이라 하더라도 촬영현장을 유린한 여배우라는 낙인이 찍힐 수밖에 없었다. 그 사건 뒤로 김삼화는 영화계에서 기피인물 리스트에 올랐고 작품 활동이 신통치 않았다. 이후 도미했다는 소식만 풍문으로 들었을 뿐이다.

이 일화를 임권택 감독이 최근 어느 방송에서 여배우의 실명을 거론하지 않은 채 언급했다. 유명 감독이 과거 어느 여배우와 따귀를 맞고 때린 비화이니 시청하던 네티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마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네티즌들은 재빠르게 반응했다. 재색을 겸비한 모 여배우가 임 감독을 꿇어 앉혀놓고 뺨을 석대나 때렸다는 비화는 황색언론의 생리에 꼭 맞는 흥미거리이기도 했다.

프로그램을 시청한 네티즌들은 능수능란한 사냥개처럼 그 여배우의 실명과 그녀가 출연한 영화 '비련의 섬'이라는 작품 이름을 찾아냈다. 자연스럽게 그 영화를 연출한 이가 정창화 감독이라는 사실과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사실 배후에는 정창화와 여배우의 '모종의 관계'가 있었으며 그 모든 문제의 발단은 알고 보면 정창화 감독이라는 결론까지 내었다. '비련의 섬' 비화는 결국 나비효과를 불러오고야 말았다. 임감독이 거론하지 않은 실명들은 모두 드러나버렸고, 엉뚱하게 나까지 배후인물로 왜곡되어 드러나게 된 것이 아닌가.

'뭔지 모르지만 촬영중단 소동을 부린 사건'의 이면에 정작 감독 정창화와 여배우의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초점이 모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와중에 내가 침묵한다면 사건의 몸통은 영원히 가려지고 엉뚱하고 왜곡된 깃털만 흐드러지게 나부낄 듯 하여 이 기회에 사건의 전모를 밝힐 수 밖에 없다.

우연이지만 한국일보에 옛일을 술회하던 중, 공교롭게 터져버린 이 비화가 어쩌면 묵과해 버릴 수 있었던 드라마틱한 일화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 또한 반전 만발한 운명이고 기이한 인연이 아닐까 싶다.

얼마 전 한국에선 고 장자연 자살사건으로 연예계의 성상납 사건이 사회적 물의를 빚으면서 소위 '캐스팅 카우치'(casting couch)라는 단어가 키워드로 떠올랐다. 감독들이 배역을 미끼로 성 상납을 요구한다는 함의가 있는 단어이리라. 그러나 이는 일부분의 일일 뿐 모두 다 그런 식으로 배우를 캐스팅한다고 함부로 규정지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경우는 여배우뿐 캐스팅만 아니라 그 어떤 야합도 단호히 거절하며 지금까지 영화감독으로서 어떤 오명이나 오점 없이 살아왔다. 예컨대 세트 디자이너가 감독에게 뭔가를 상납하면 모래 위에 집을 짓듯 대충 세트를 적당히 짓고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난 절대 그런 식으로 어물쩍 넘어간 적이 없다. 그러려는 시도가 있던 적은 있으나 난 그 세트를 모두 때려 부수고 다시 짓도록 했다. 이와 관련한 일화는 유명해서 김수용 감독은 지금도 이를 화제로 삼곤 한다.

무엇보다 여배우의 약점을 잡아 성 상납을 받거나 뒷돈 거래를 하는 자는 감독 자격이 없다고 단언한다. 이 정도의 자긍심과 자존심이 없이 어찌 지극히 공적인 지위라 할 수 있는 영화감독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영화계뿐만 아니라 사회 어느 부문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소수의 소신 있는 자들이 이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보루이기 때문이다.

영화감독과 배우 커플이 많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여배우와 감독이 사랑에 빠질 수는 있다. 그럴 수 있는 기회도 상대적으로 많을 수 있다. 그러나 감독은 프로이고 영화를 책임지는 리더가 아닌가. 다른 어느 것보다 우선은 작품이다. 로맨스는 마음을 설레게 하거나 혹은 번거롭게 하는 부차적인 영화외적 일상의 한 부분일 뿐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나의 회고전이 있었을 때의 일이다. 작품을 상영한 후 관객과의 대화가 있었다. 1,300여석이 꽉 찬 극장에서 종영 뒤에도 거의 나가는 관객이 없이 진지하게 작품에 대한 대화가 이어지던 중, 어느 프랑스 여배우가 당돌한 제안을 했다. 자기와 생활하면서 자신을 배우로 하는 작품을 구상하는 것은 어떠냐는 것이었다. 그 여배우의 솔직하고 당찬 모습 때문에 오히려 객석 뒤 쪽에 앉아 있던 아내와 아무 거리낌 없이 유쾌하게 웃으며 정중히 거절할 수 있었다.

여배우가 연기자로서 자신이 출연하고 싶은 작품의 감독에게 적극적일 수는 있다. 그러나 가능성이 모두 현실화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감독은 작품에 대한 집중력이 생명이다. 내가 지면을 빌어 단호히 내 신념을 밝히는 것은 몇 가지 사회적 가십거리로 인해 모든 영화인, 특히 영화감독이 매도 당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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