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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강의를 찾아서] 작가 김훈 '소설적 상상력과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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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강의를 찾아서] 작가 김훈 '소설적 상상력과 인문학'

입력
2011.04.22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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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성 버리면 소설 죽는다, 한자 버리면 인문학 죽는다"

작가의 상상력은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그것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일반인들은 자기가 직접 '그 무엇'과 만나는 것으로 끝나지만, 소설가 시인 등 작가는 '그 무엇'과 만나는 걸로 마무리하지 않는다. '만난 것'을 토대로 또 다른 만남, 즉 상상력을 동원해 다른 세상을 보여 주고자 한다. 이게 '소설적 상상력'이다. 이런 상상력이 작가의 능력이자, 동시에 작가정신이기도 하다.

지난 15일 숭실대 한경직기념관 김덕윤예배실에서 열린 인문학 포럼에 '소설적 상상력과 인문학'을 주제로 강연한 소설가 김훈도 집필 과정에서 상상력의 힘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소설적 상상력은 사실성에 바탕을 둬야 한다"는 지론을 폈다. 그는 또 대학의 인문학 위기에 대해서도 "한자 교육을 멀리한 대학이 자초한 측면이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소설적 상상력은 한계가 없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던 댄 브라운 작 <천사와 악마> 를 보면 소설적 상상력이 얼마나 깊고 넓을 수 있는지, 또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올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속에 숨겨져 있는 놀라운 역사적 비밀을 파헤쳐가는 미스터리 스릴러 형식의 이 소설은 인류 역사의 이면에 가려진 흥미진진한 비밀들을 풀어가며 독자들의 눈을 붙잡았다.

당대의 작가 김훈도 소설적 상상력은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핵심부품 같은 존재라고 설명했다. 다만 그 자신은 뛰어난 소설적 상상력이 있지는 않다고 했다. 그는 "상상력은 대개 영감력이라 할 수 있는데, 나는 생애에서 '영감이 떠올랐다'고 할만한 순간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영감을 말하는 사람은 잘 모르겠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상상력은 사실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성을 저버린 상상력은 어거지, 즉 거짓말에 가까운 억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실성을 근거로 발휘된 소설적 상상력이 작품에 녹아들어야 독자들이 신뢰할 것이라는 얘기다.

영감을 느껴본 기억이 없다던 그도 강연 전 둘러본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의 유물을 접하면서 놀라운 마음을 가지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선사시대 돌칼의 손잡이가 닳아 있었다. 이 돌칼을 오랫동안 잡고 사냥했던 당시 인간들이 떠올랐다. 그걸 보면서 놀랍고 눈물겨운 생각이 들었다." 소설적 상상력이 왜 사실에 입각해야 하는지를 간접적으로 설명하는 대목이다.

강의는 인문학으로 옮겨갔다. 그는 "거창한 인문학의 세계를 논할 자격이 없다"면서도 대학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일침을 놓았다. 대학이 스스로 인문학을 고립으로 몰고 갔다는 진단이다. 가장 큰 원인을 한자 교육 철폐에서 찾았다.

"한글 중심의 교육은 당연하지만 대학이 한자 교육에 등을 돌린 것은 야만적인 행위다. 한자가 갖는 엄청난 사유(思惟)의 힘과 개념의 힘을 대학이 안 가르치다 보니 인문학이 황폐해졌다. 한자의 힘에 의해 사유의 영역을 무한히 넓힐 수 있는데도 대학이 외면하는 바람에 인문학이 고사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학교에서 세종대왕을 가르칠 때 훈민정음 반대 상소문을 올렸던 집현전 원로학자 최만리에 대한 수업도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만리의 상소문은 경청할만한 내용이 있다. 그가 고루한 의식의 사대주의자였음은 맞다. 완강한 자존심에 가득찬 보수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고구려 때 들여온 한자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명을 만들었기 때문에 한자는 외국어가 아니라고 파악했다. 문화의 근본을 공유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는 얘기다. 바로 이게 한글 교육을 할 때 최만리라는 인물이 내세운 한자의 정당성도 가르쳐야 하는 이유다."

강의가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그의 논점은 인간의 삶으로 옮겨졌다. 소설적 상상력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삶이 존재하지 않는 한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삶이 세상과 직접 맞부딪치는 대목을 표현하고 쓰는 게 목표지만, 실제로는 아주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현실적으로 직접성을 추구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왜 그렇게 여기느냐"는 질문에 대해 "인간과 세상 사이에 놓인 매체와 언어, 기호, 상징, 컴퓨터 같은 수많은 장애물이 직접성의 관계를 차단하고 있다"는 말로 대신했다. 이런 장애물을 모조리 걷어내고 세상의 실체와 직접 소통해야 소설적 상상력이 더해지고 제대로 된 글이 나온다는 판단으로 이해됐다.

그는 특히 언어와 말은 비극적 운명을 타고났다고 했다. 인간이 세상과 직접 맞닿을 수 없게 작용하는 탓이다. 이같은 '훼방꾼' 언어를 뛰어넘는 나름의 노력도 소개했다. "나는 자동차 운전을 못한다. 컴퓨터를 만져본 적이 없다. 카메라로 사진 찍은 적이 없다. 비디오 기기도 못 만진다. 연필만 사용한다. 연필이 아니면 글을 쓸 수가 없다. 연필을 사용하면 어깨에서부터 손가락 끝까지 살아있는 육체의 힘이 느껴진다. 그런 육체의 감각을 통해 언어의 간접성을 지울 수 있을거라는 환상을 갖고 있다."

강의 말미에 그는 최근 인문학계의 화두가 된 '정의'와 관련해 비교적 명료한 입장을 제시하기도 했다. 마이클 샌들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 는 책의 내용과는 다른 제목이라고 했다. <무엇이 정의인가> 가 맞다는 것이다. "원래 제목은 <저스티스> 로 돼 있는데, 이걸 <정의란 무엇인가> 로 해석한 것은 옳지 않다. 책의 내용을 보면, 삶의 구체성과 직접성 속에서 어느 것이 정의이고, 얼마만 한 게 정의인지, 뭐 이런 구체성과 관련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따라서 정의란 개념을 포괄적으로 질문하는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은 적절치 않다. 무엇이 정의인가라는 질문을 갖고 사회 현상을 들여다볼 때 하나의 사태에 대해 모순되고 상반되는 여러 정의들을 확인할 수 있다."

■ 강의실 메운 대학생들 '인간 김훈'에 더 관심

넓지 않은 강연장을 가득 메운 100여 명의 대학생들은 사실 <소설적 상상력과 인문학> 이라는 거창한 특강 주제보다는 '인간 김훈'을 더욱 주목했다. 이를 감지했는지는 김훈은 주어진 2시간의 강연 시간 중 40여분을 질의응답에 할애했다. 질문도 날카로웠지만 답변 역시 당대의 작가답게 꽉 찬 느낌이었다.

_당신을 끌고 나가는 힘은 무엇인가.

"나는 세상과 불화가 많다. 직장을 수없이 때려 치운 것도 순전히 불화 때문이었다. 나는 불화가 있으면 타협하지 않았다. 혼자서 긴장 상태를 유지하면서 사는 게 훨씬 건강하다. 그것이 내가 세상에 맞서는 힘이다. 나는 호기심이 많다. 삶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는 걸 좋아한다. 규율에도 엄격한 사람이다. 그런 걸로 세상에 맞서면서 산다. 그게 나의 작품을 이끄는 힘이 아닐까."

_작품을 쓸 때의 자세가 궁금하다.

"기본적으로 글이란 전술과 전략을 갖고 쓰는 것이다. 아주 치밀하게 접근해야 좋은 글이 나온다. 가령 내 작품 <칼의 노래> 중에서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폐허가 된 남해안을 이것보다 절묘하게 묘사한 문장이 있을지 모르겠다. 수백 번을 고민한 뒤에 쓴 구절이다."

_특별히 즐겨 읽는 책은 있나.

"<난중일기> 를 자주 보는 편이다. 한 장수가 매일매일 쓴 진중일지에 불과하지만, 좋아하는 문체들이 있어서 배울 점이 많다. 감동적인 문장들도 많다. 대학 다닐 때 처음 읽었는데, 이게 내 인생을 바꿔 놓았던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감사하다."

_요즘 젊은이들은 야만적인 적자생존의 세계에 살고 있다. 야만성의 꼭대기에 존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최선이라고 보나.

"인류가 당연한 가장 큰 문제가 약육강식이다. 악과 폭력의 구조가 약육강식의 형태로 나타난다. 자신의 살점을 강자에게 내주기만 한다면 사람이 아니지만, 약육강식의 질서에 저항하면서 때론 밟히면서 사는 게 인간의 운명인걸 어쩌겠나. 우리는 시장의 질서와 자율성, 정의 같은 게 약육강식을 해결해주리라고 여기고 있으나 시장 자체가 정글이고 예수처럼 우리를 구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공정한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는 아닐 수 있다."

■ 김훈

●1948년 서울 출생. 고려대 영문과를 다니다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4학년 때 그만뒀다. ●군 복무 후 1973년 한국일보에 들어와 20여 년 이상을 문화부 기자로 지내면서 빼어난 필력을 선보였다. ●특히 박래부 기자와 함께 한국의 대표적 소설가, 시인의 작품 현장을 다룬 '문학기행'은 신문기사 수준을 넘어 그 자체로 문학작품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94년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대표작으로 소설 <칼의 노래> , <남한산성> , <공무도하> 등이 있다. 상복도 많아 동인문학상(2001년), 황순원 문학상(2005년), 이상문학상(2004년), 대산문학상(2007년) 등을 수상했다. 연필로 글쓰기를 고집하고 있다.

김진각 편집위원 kimj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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