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청바지, 빗자루라도 되는 양 땅을 쓸고 다녔다. 하도 길다 보니 바짓단이 신발 뒷굽에 무자비하게 밟혀 너덜너덜 헤졌다. 허리선은 골반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고, 허벅지부터 점점 펑퍼짐해지면서 발끝으로 와선 아예 신발을 덮어버릴 정도로 품이 넓어졌다. 1990년대 중∙후반 젊은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힙합 스타일 청바지를 입었다.
15년쯤 흐른 지금 청바지, 결코 신발 따위에 밟히지 않겠다는 듯 발목까지 확 올라왔다. 치마인지 바지인지 헷갈릴 정도로 헐렁했던 품은 엉덩이와 다리 모양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만큼 딱 달라붙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런 스키니 진 하나씩 다들 갖고 있다.
참 변화무쌍하다. 청바지로 대표되는 데님 패션의 시초는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90여 년 전과 지금 데님 패션의 가장 큰 차이는 '멋'이다. 데님은 이제 아무렇게나 입는 쉬운 옷이 아니라 스타일링이 필수인 깐깐한 옷이 됐다.
촌스럽지 않은 청-청 대세
올 봄 데님 패션의 큰 흐름은 1970년대 풍이다. 90년 남짓한 데님 역사에서 70년대는 중요한 변화의 시기였다. 미국과 유럽에선 변화와 평등, 일탈을 추구하는 히피족들이 개성 살린 무늬를 그려 넣은 데님 재킷과 청바지를 입고 거리를 누볐다. 그들에게 데님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내보일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생맥주, 통기타와 함께 청바지가 청년문화를 대표하는 아이템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도 1970년대였다. 데님은 사회 기득권에 저항하고 정의를 노래하는 이들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요즘 의류매장에선 그 시절 즐겨 입던 청재킷-청바지 스타일이 눈에 많이 띈다. 이른바 청-청 패션이다. 색이 바래고 군데군데 헤진 채 입었던 그 시절 그 데님은 편안함과 자유분방함을 뜻했다. 이런 느낌을 살리기 위해 의류업체와 디자이너들은 새 데님 원단을 일부러 세탁(워싱)해 오래돼 물이 빠진 느낌을 연출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본격 유행을 탄 이 같은 빈티지 데님은 지난해까지 강세를 이어왔다.
하지만 올 봄 데님은 워싱을 하지 않은 생지가 대세다. 원단의 청명한 청색을 그대로 살리는 것이다. 70년대보다 한층 밝고 가벼워진 느낌이다. 빈티지가 의도적으로 편안함을 연출한 스타일이었다면 생지는 입는 사람이 스스로 편안함을 만들어가는 스타일이다. 입고 벗고를 반복하는 동안 여기저기 주름이 잡히고 굴곡이 생기면서 데님은 점점 입는 사람의 체형에 맞춰진다. 때문에 좀더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개성과 매력을 내보일 수 있다.
워싱 없는 데님을 가장 스타일리시하게 코디하는 방법으로 패션 전문가들은 흥미롭게도 70년대 청-청 패션을 다시 꼽는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데님 온 데님 스타일이다. 온라인쇼핑몰 일모스트릿닷컴 MD 이수정 과장은 "다만 색상이 서로 다른 데님을 함께 매치해야 세련되게 보인다"며 "예를 들어 밝은 청색(인디고 블루)의 헐렁한 셔츠에 어두운 청색의 스키니 진을, 또는 깔끔한 라인의 중간 청색 재킷에 무릎까지 오는 연한 청색 스커트를 맞춰 입는 식"이라고 조언했다.
싼 옷에서 비싼 옷으로
사실 데님의 시초는 작업복이다. 1920년대 미국의 광부나 철도기술자들이 일할 때 입을만한 튼튼한 옷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천막을 만들던 천(데님)으로 바지를 만들었던 게 청바지의 시작이었다니 말이다. 한 마디로 데님은 서민들이 막 입던 옷이다.
'데님=서민'이란 무언의 공식이 깨지게 된 시기는 대략 60년대부터다.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격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일과 여가를 함께 즐기려는 젊은 재력가들이 양복 대신 데님을 입고 비즈니스 자리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뒤 기다렸다는 듯 프리미엄 데님 브랜드가 등장했다. 디테일한 디자인과 독특한 액세서리, 차별화한 색상을 내세우며 데님 가격을 수십 만원대로 끌어올렸다. 최근 국내에서도 세븐진과 알렌제이, 씨위 같은 프리미엄 데님 브랜드가 선보이기 시작했다. 국내와 중국의 씨위 독점판매권을 확보한 신원 박성철 회장은 "아시아에서 프리미엄 데님 시장은 계속 확장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제 데님은 더 이상 막 입는 옷이 아니다.
하이힐과의 운명적인 만남
90년대까지 청바지엔 누가 뭐래도 운동화였다. 90년대 힙합 스타일도, 밑위가 길어 엉덩이를 완전히 덮으며 둥근 히프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났던 80년대 스타일 청바지도 운동화나 단화 같은 편안한 신발과 어울렸다.
그러다 2000년대 초반 청바지가 다리에 착 달라붙기 시작하면서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운동화를 내치고 하이힐이 떡 하니 청바지 밑단에 자리를 잡았다. 허벅지부터 발끝까지 길게 쭉 뻗은 일자바지, 허벅지에선 다리를 감싸다 무릎부턴 살짝 넓어진 나팔바지는 운동화보단 하이힐과 더 궁합이 맞았다.
아마 그때부터 아니었을까. 여성들이 청바지에 '구속'되기 시작했던 게 말이다. 청바지가 들어〈윰캅?다이어트 성공 기준이 됐을 정도다. 누구나 쉽게 입을 수 있던 청바지가 점점 날씬한 여성의 전유물로 바뀌었다. 다리에 착 감겨 각선미를 드러내는 데님은 아예 다리를 노출하는 반바지나 스커트를 제치고 당당히 섹시함의 상징이 됐다. 최근 유행하는 스키니 진은 '데님=섹시' 공식의 '종결자'다.
이젠 아예 데님 스타일용 하이힐이 따로 나왔다. 바로 올 봄 유행을 예고하고 있는 데님 소재 웨지힐(밑창과 굽이 연결된 여성용 구두)이다. 나인웨스트 마케팅팀 관계자는 "데님 웨지힐은 시원하고 세련된 스타일과 편안한 착화감 덕분에 고객들의 꾸준한 관심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하이힐뿐 아니라 청아하고 맑은 분위기의 데님 원피스도 올 봄 새롭게 주목할 만하다. 당분간 데님 스타일링 키워드는 '여성'이 될 듯하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