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사그라질 때가 되자 꽃보다 고운 신록이 피어났다. 꽃물결의 끝자락에 매달린 꽃송이와 이제 막 솟아나는 신록이 함께 어우러졌다. 그 묘한 엇갈림이란. 그 찰나의 마주침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저릿해온다. 날카로운 찰나의 사랑에 마음을 베인 듯하다.
섬진강의 신록, 꽃보다 아름답다
매화와 산수유가 봄을 열었던 섬진강가를 다시 찾았다. 강변의 벚꽃터널엔 나뭇가지보다 바닥에 더 많은 꽃잎이 흐드러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꽃사태에 정신이 어질하다. 저 꽃잎을 떨어뜨리는 건 바람만이 아닐 터. 초록의 이파리가 움트며 꽃잎을 밀어 떨어뜨린다.
강가의 수풀에도 초록이 번지고 있다. 새순의 푸르름, 아기초록이다. 연둣빛 어린잎들. 영락없는 갓난 아기의 조막손 같은 연한 잎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은 꽃사태 이상이다. 멈춘 듯 정한 강물 위로 번지는 연두 담황 담록의 빛들이 파스텔톤으로 서로의 경계를 뭉개며 서로에 깃든다. 누가 초록을 소박하다 했는가. 신록의 푸름은 그 어떤 것보다 눈부시고 찬란하다.
강변엔 못다 진 벚꽃이 남았고, 함박눈이 내린 듯한 화사한 배꽃이 가득한데도 시선은 먼저 반가운 아기초록에 가 닿는다. 색색의 꽃으로 이어지던 화려한 봄의 변주의 끝. 연둣빛 꽃송이인 찬란한 신록이 봄의 절정을 노래한다.
은은한 차향의 하동차밭
벚나무 버드나무에 새순이 오를 때 차나무에서도 순이 돋는다. 차 애호가들이 그토록 기다려온 때가 바로 이맘때. 20일 곡우를 전후해 앙증맞은 차의 새순이 퍼뜨리는 첫 차 맛을 얻기 위함이다.
경남 하동은 국내의 대표적인 차 생산지다. 하동의 차 역사는 1,0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를 보면 신라 흥덕왕 3년(828년)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이 차나무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 자락에 심었다고 한다. 하동군은 김대렴이 차나무를 심은 곳이 바로 하동군 화개골이라 주장한다.
지리산 골짜기 중 하나인 화개골은 호리병 모양으로 남쪽에서 들어온 따뜻한 공기를 오래 머물게 한다. 강수량도 풍부하고 계곡이 품은 안개도 차에 적격이다. 자갈이 많은 풍화토 지형이라 차나무가 깊게 뿌리를 박아 땅 속 영양분을 고르게 흡수한다고 한다.
보성의 차밭이 초록뱀이 열지어 기어가는 듯한 통일감을 주는 디자인이라면, 급경사의 산비탈에 제멋대로 들어선 하동의 차밭에선 비정형미를 발견할 수 있다. 하동의 차는 비싸다. 기계화한 다른 지역의 차와 달리 가내 수작업 형태의 고급차 생산에 주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는 하동뿐 아니라 많은 차 생산지가 지난 겨울 혹독한 추위로 큰 피해를 입었다. 싱그러운 푸르름을 보러 찾아갔지만 많은 차밭이 빨갛게 색이 바래있다. "녹차밭이 아닌 홍차밭"이란 서글픈 우스개가 나올 정도다.
하동야생차문화축제 준비위측에선 "군내 30% 차밭이 동해(凍害)를 입었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나무 전체가 얼어 죽은 건 아니고 찬바람을 고스란히 맞아야 했던 가지 윗부분만 동해를 입었다고 한다.
하동의 한밭제다를 들렀을 때다. 이곳은 하동다원 8경에 드는 아름다운 경치의 차밭이다. 커다란 바위가 여기저기 박힌 경사진 땅에 차나무가 비대칭적으로 꿈틀대며 펼쳐졌다. 차나무와 바위는 궁합이 잘 맞는다. 바위는 한낮 뜨겁게 받은 열기를 품어 나무에 전달하고, 새벽엔 맺힌 이슬로 차나무에 물을 대준다고 한다. 차밭을 두른 소나무와 어우러진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이다. 차밭도 이 정도면 예술이다.
한참 차밭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데 다원의 한 분이 다가와선 방금 햇차를 냈다고 귀엣말로 전한다. "이게 웬 횡재인가." 주저없이 차 체험장으로 가서는 방금 우려낸 햇차 한 잔을 마셨다. 입안 가득 퍼지는 향긋한 초록의 기운. 차를 목으로 넘기고 나자 혀에는 맑은 침이 고였다.
다원 관계자는 벌써 걱정이란다. "지인과 단골들이 서로 햇차를 보내달라 아우성인데 동해로 차가 많이 부족할 거예요. 인심 다 잃게 생겼어요."
악양들 청보리의 카드섹션
차밭이 밀집한 화개골에서 나와 섬진강을 따라 남쪽으로 10여 분 달리면 갑자기 넓어진 들판을 만난다. 대하소설 의 주무대인 악양면 평사리의 너른 들판, 악양들이다. 들판은 넓기도 하거니와 지리산 골짜기까지 깊숙이 뻗어있다. 경지 정리가 잘 된 들판은 몬드리안의 추상화를 보는 듯하다. 들판 곳곳에 배꽃이 흐드러졌지만 악양들 전체의 색감은 초록이다. 청보리밭 때문이다.
이제 종아리까지 올라온 청보리가 출렁이며 봄바람을 하늘에 그려대고 있다. 들판의 한가운데 악양들의 상징이 된 부부 소나무가 서있어 허공으로 달아나려는 시선을 붙잡아 맨다.
최참판댁 옆길로 해서 산길을 올라 작은 사찰인 한산사 앞에 섰다. 너른 악양들과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80만평(260만㎡) 너른 들녘이 넉넉하게 가슴에 들어온다.
자로 잰 듯 경지정리된 악양들 전경이 눈에 익은 듯 하면서 또 생소하게 느껴진다. 그 이유가 뭘까. 누가 그건 비닐하우스가 없어서란다. 그러고 보니 전국의 어느 논밭에나 늘 보이던 비닐하우스가 이 넓은 땅에는 신기하게도 하나도 없다.
청보리 일렁이는 악양들. 봄기운이란 필터가 악양들을 감싸 안고 있다. 그 필터 너머로 아련한 초록이 번진다. 봄이 번진다.
하동=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섬진강 달빛차회·사랑의 녹차 세족식…하동야생차문화축제 5월 4일부터
많은 차나무가 벌겋게 동해를 입었어도 하동 차축제는 열린다. 하동군 관계자는 "예년만큼 차가 많이 나진 않겠지만 차축제는 계속된다. 축제는 곧 차의 계절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기에 쉽게 접을 수 없었다"고 했다.
제16회 하동 야생차문화축제는 5월 4~8일 하동군 화개면과 악양면 일대에서 펼쳐진다. 3년 연속 대한민국 최우수 축제로 뽑힌 야생차문화축제는 오랜 차의 역사를 담고 있는 하동만의 독특한 색깔과 이야기를 전해준다.
대표 프로그램은 '섬진강 달빛차회' 와 '대한민국 차인(茶人) 한마당'. 평사리 섬진강가에서 열리는 달빛차회는 전국의 차인들과 관광객들이 백사장에서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 독특한 행사다. 차인 한마당은 한국 전통차 문화를 소개하는 장이다. 온라인 사전 접수를 통해 뽑힌 관광객을 대상으로, 왕이 직접 차를 베푸는 의식인 접빈다례(接賓茶禮)도 선보일 예정이다.
첫날인 4일에는 시배지 다례식과 올해의 좋은 차 품평회가 열리고, 5일에는 대렴공 추원비 헌다례를 시작으로 산사음악회 등이 펼쳐진다. 6일은 최고차나무 헌다례를 시작으로 대한민국 녹차요리 콘테스트가 축제를 장식한다. 7일에는 국제 차 학술심포지엄과 사랑의 녹차 세족식, 대한민국 차인 한마당, 섬진강 달빛차회가 열린다. 마지막 날인 8일에는 외국인 차예절 경연대회 등이 예정돼 있다.
평사리 최참판댁에서 다양한 차문화를 소개하는 오색 찻자리, 평사리 청보리밭과 섬진강 은빛 모래를 맨발로 걷는 행사인 '슬로시티- 소풍' 도 눈 여겨 볼 행사다.
하동=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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