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행하는 질문을 프로배구 V리그 최고의 리베로 여오현(33ㆍ삼성화재)에게 던졌다. ‘리베로는 □□다’라는 정의를 부탁하자 곧바로 ‘리베로는 힘들다’는 더없이 솔직한 답변이 돌아왔다. 여오현은 ‘좀 더 멋진 말이 없을까’고민하는 눈치였지만 올 시즌 새로운 임무를 맡아 팀을 이끌었던 여오현의 남다른 고충을 대변하는 말이라 금세 진심이 느껴졌다. ‘살림꾼’에 정신적 리더 역할까지 맡아 가장 힘든 시즌을 보냈다는 여오현과 19일 솔직 담백한 이야기를 나눴다. 리베로로서 배구명가 삼성화재의 영광을 함께 한 여오현의 남모를 땀방울이 삼성생명 휴먼센터 내 배구코트에 고스란히 배어있었다.
리베로의 꽃은 여전히 활짝
성균관대 2학년 시절 여오현의 인생을 바꾼 희소식이 들려왔다. 리베로(수비전문선수) 제도가 도입된다는 것. 그 동안 레프트로 활약했던 여오현은 “아마 리베로 제도가 도입되지 않았다면 배구를 중간에 그만뒀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그리고 또 한번의 전환점은 2000년 12월에 찾아왔다. 그는 “신인 드래프트에서 1, 2라운드에 뽑힐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행운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3라운드 1순위 지명권을 가진 삼성화재는 타임까지 부르며 고심한 끝에 최부식(대한항공)과 여오현 중 여오현을 택했다.
어느새 삼성화재 주전 중 최고참이 된 여오현은 ‘정신적 지주’ 역할까지 도맡아야 했다. 그는 비록 올 시즌 수비상을 최부식에게 내줬지만 김정훈과 가빈 슈미트 등의 수비 조련을 맡는 등 그물망 수비벽을 형성, 삼성화재의 드라마틱한 우승을 이끌었다. 그는 “삼성화재에 있으면서 가장 힘든 시즌이었다. 후배들을 함께 이끌고 가야 했기 때문에 다독이고 파이팅하면서 시즌을 보냈다”고 털어놓았다. 프로 2, 3년 차일 때 전성기가 왔다는 그는 “올해도 보란 듯 우승했다. 코트에서 활약하는 한 내 인생의 꽃은 활짝 펴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코트에서 집에서’ 리베로는 내 운명
여오현의 리베로 운명은 코트에서나 집에서나 마찬가지다. 여오현은 빵점 아빠에서 100점 아빠가 되기 위해 배구공을 놓지 않고 있다. 그는 “지난 17일이 둘째 아들 원경이의 돌이었다. 원경이한테는 항상 미안하다. 태어난 뒤 같이 보낸 시간이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것 같다”고 미안함을 표현했다.
그러나 집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만큼은 두 아들에게 헌신한다. 여오현은 첫째 아들 원영(5)과 배구놀이에 빠져있다. 그는 “작고 말랑한 공으로 원영이와 배구를 한다. 원영이가 서브와 스파이크 등을 때리고 주로 내가 받는 역할이다. 집에서도 ‘리베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라며 활짝 웃었다. 그는 “첫째가 운동에 소질을 보인다. 본인이 배구를 하겠다면 적극적으로 밀어줄 예정”이라며 ‘2대 배구 가족’ 탄생을 기대케 했다.
역대 최강팀 ‘삼성화재 77연승 시절’, 최고 용병 가빈
실업팀 입단 후 한 번도 빠짐없이 11차례나 챔피언결정전에 출전한 여오현은 또 하나의 기록을 넘보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총 9차례의 우승을 차지했다. 아마 (최)태웅이 형과 챔피언결정전 출전 기록이 11번으로 똑같다. 다음 시즌에도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한다면 이 부문 최고 기록을 갖게 된다”고 욕심을 드러냈다.
삼성화재와 함께 9차례 우승 영광을 함께 한 여오현에게 역대 최강팀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삼성화재의 77연승 시절(2001~04)을 꼽았다. 3년이 넘게 단 한번도 패하지 않으며 무적행진을 벌였을 때다. 그는 “당시 김세진과 신진식 좌우 쌍포에 센터 김상우, 신선호를 비롯해 장병철, 석진욱, 최태웅 등 백업 멤버들도 화려했다”고 털어놓았다. 2002년 겨울 ‘폭설’로 인해서 연승 행진이 끊길 뻔한 일화도 소개했다. “장충체육관에서 상무전을 앞두고 있었는데 폭설로 인해 버스가 경기장 3㎞를 앞두고 서 버렸다. 선수들이 모두 버스에서 내려 히치하이킹을 했고 경기 시작 5분 전에 도착했다. 모두 눈에 젖은 신발을 신고 급하게 몸을 푼 뒤 바로 경기에 나섰고 3-2로 겨우 이겼다.”
역대 최고의 용병을 물으니 지체 없이 가빈을 찍는다. 그는 “가빈이 올해 더 업그레이드된 것 같다. 신장, 점프, 스피드 등에서 가장 우월하다고 볼 수 있다”며 “올해 수비도 많이 좋아졌지만 키가 커서 수비에서는 어설플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009년 이탈리아행 이야기가 나돌았던 여오현은 해외 진출 꿈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는 없었다. 그는 “당시 이탈리아팀에서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았고 좋은 조건도 아니었다. 만약 진출했더라면 중간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았겠느”며 “후회는 없다. 지금도 팀에서 잘하고 있지 않냐”고 말했다. 삼성화재의 우승 DNA가 뼈 속 깊이 박혀 있는 여오현이 앞으로 얼마나 더 우승컵을 추가할지 주목된다.
용인=김두용기자 enjoysp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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